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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아의 후 스토리 ⑨ ‘불법촬영’에 분노하는 여성들

페미니스트그룹 ‘불꽃페미액션’이 지난 19일 서울 신촌역에서 여성혐오 근절을 촉구하며 흰 장미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주머니 속의 송곳이죠.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띄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주머니나 가방 속에 송곳을 넣어 다닌다면, 아니 다녀야 한다면 어떨까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온라인 여성 커뮤니티 등을 보면 송곳이나 옷핀, 실리콘이나 스티커, 퍼티(속칭 빠데·아교풀)를 갖고 다닌다는 이들이 눈에 띕니다. 불법촬영(몰카) 공포 때문이죠. 화장실 벽에 구멍이나 틈새가 있으면 송곳·옷핀으로 찔러봐 렌즈를 깨버리거나, 실리콘·스티커·퍼티로 틀어막기 위해서랍니다.

‘몰카’는 더 이상 이경규씨의 출세작 ‘몰래카메라’가 아닙니다. 피해자를 죽음으로 몰고 갈 수도 있는 범죄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극소수의 관음증 차원을 넘어섰다는 점입니다. 보안업계에선 ‘화장실 몰카’가 촬영부터 유통에 이르는 ‘산업’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젊은 여성들에게는 북핵보다 무서운 게 몰카라고 합니다. 북핵은 터진 적이 없지만 몰카는 학교 기숙사, 직장 탈의실, 카페 화장실, 지하철 객차에서 365일 ‘포식자’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발생한 ‘홍익대 누드 크로키 모델 불법촬영’ 사건과 ‘비공개 촬영회 성추행’ 사건은 여성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전자는 가해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편파수사가 이뤄진 것 아니냐는 논란을 빚었습니다. 후자는 가해자의 카카오톡 대화 내용이 무차별 공개되면서 2차 피해로 번졌습니다. 수십만명이 청와대에 국민청원을 하고, 또 다른 여성들은 거리로 나섰습니다. 지난 19일 서울 혜화역 일대에서 열린 시위에는 1만2000여명이 모였습니다. 여성만 참여한 집회로는 역대 최대입니다. 26일에는 혜화역 집회 운영진과 또 다른 인터넷 카페 주최로 청계천 한빛광장에 800여명이 모였습니다. 두 집회 모두 참여 자격은 ‘생물학적 여성’으로 한정됐습니다.

시위 방식이 폐쇄적이다, 편파수사가 아닌데 편파라고 한다, 구호가 과격하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판에 앞서 왜 화를 내는지부터 들어보면 어떨까요. 여성들은 오랫동안 불법촬영에 분노해왔습니다. 하지만 1만2000명이 모이기 전까지는 정부와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1만2000명이 모이자 이번에는 시위에 나선 이유·맥락·배경보다 방식·구호를 문제 삼습니다.

20세기 초 영국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을 펼친 ‘서프러제트’가 떠오릅니다. 이들은 초기에 평화적 캠페인을 펼치다 1908년부터 ‘말이 아닌 행동’을 구호로 급진적 투쟁으로 전환합니다. 결국 10년 뒤 ‘30세 이상으로 일정 재산을 가진 여성’에 대한 제한적 투표권을 쟁취합니다. 다시 10년 후, 남성과 동등하게 21세 이상 모든 여성이 참정권을 갖게 됩니다. 혜화역과 한빛광장에 모인 여성들은 서프러제트 못지않게 절박합니다. 그러나 타인에게 위협적 행동을 한 일이 없습니다. 조금 ‘쎈’ 구호 몇 마디로 절박한 외침이 왜곡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 국가는 할 일을 하고 있나

페미니스트그룹 ‘불꽃페미액션’이 지난 19일 서울 신촌역에서 여성혐오 근절을 촉구하며 흰 장미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찰칵찰칵 몰카남 안찍는 곳 없다네/ 학교 직장 길거리 지하철역 화장실/ 찰칵찰칵 몰카남 매일매일 촬영해.”

검은 옷을 입고 마스크를 쓴 여성들이 동요 ‘작은 별’을 개사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또 찍어?” “몰카 피해자에게 전화하면 ‘자살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는 등의 문구가 적힌 손팻말을 들었습니다. 마스크 착용에 대한 사회자의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극우 남성 커뮤니티에서) ‘너네 당당하면 얼굴 까’ 하는데 얼굴 까면 몰카 찍을 거잖아!” 화장실에 갈 때는 반드시 3인1조로 움직이라는 행동지침도 전달됐습니다. 시위 참가자들을 겨냥한 협박 글이 온라인에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지난 26일 청계천 한빛광장에서 본 풍경입니다. 광장 바로 옆 최첨단 빌딩과의 묘한 부조화가 느껴졌습니다. 21세기형 메가시티 서울의 한복판에서, 미래가 창창한 여성들이 소리 높여 외치는 요구가 ‘몰카남 퇴치’라니 말입니다. 몰카 비판 시위에서조차 몰카를 염려해야 하는 현실도 안타까웠습니다.

이철성 경찰청장은 지난 21일 국민청원에 대한 답변에서, 홍대 사건 수사가 신속했던 것은 “제한된 공간에 20여명만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여성 가해자를 포토라인에 세운 걸 두고는 “영장실질심사를 위해 법원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노출됐다”고 해명했습니다. 시위에 참여한 여성들은 “그렇다면 가해자가 명확하게 한 명인 디지털성범죄(보복성 영상물 유포 범죄)를 신고했을 때는 왜 이 정도로 빠른 대처를 하지 않느냐”고 따졌습니다. 피의자가 포토라인에 서는 일은 ‘어금니 아빠’ 같은 강력범죄에나 적용돼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편파수사냐 아니냐는 핵심 논점이 아닙니다. 여성들의 분노는 홍대 사건을 신속·엄중하게 수사해서가 아닙니다. 남성 가해자가 절대다수인, 다른 불법촬영 사건들이 더디고 무신경하게 처리돼왔다고 여겨서입니다. 공적 시스템에 대한 불만이 누적돼오다 홍대 사건을 계기로 터졌다는 게 타당한 분석입니다. ‘이게 나라냐’의 여성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 운 나쁜 여성만 당하는 게 아니다

경향신문은 28일 아침 ‘서울의 한 여대 근처 사진관이 고객 수백명의 치마 속을 몰래 촬영해 파일로 보관해오다 경찰에 적발됐다’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한 피해자는 경찰로부터 이 사건 피해자 규모가 700명에 이른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했습니다. 불법촬영은 운 나쁜 사람만 당하는 ‘사고’가 아니라, 운 좋은 사람만 피해가는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젊은 여성들에게 불법촬영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습니다.

페미니스트그룹 ‘불꽃페미액션’이 지난 19일 서울 신촌역에서 여성혐오 근절을 촉구하며 흰 장미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 이모씨(27·간호사) “카메라 종류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양해졌다고 들었어요. 공중화장실은 물론이고, 일하는 병원에서도 화장실 가는 일이 불안합니다. 시위에 참여하고 싶었는데 가지는 못했어요. 여성들이 ‘내 몸의 주체는 나’라고 외치는데, (참가자에 대해) 테러 협박이 있었다고 해서 속이 상했습니다. 여성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알리는 시위에 대해서조차 여성혐오가 만연하다니요….”

- 윤모씨(29·회사원) “지하철 계단 오를 때는 사진 찍힐까 봐 가방으로 가리기도 합니다. 불법촬영이라는 게 오랫동안 반복돼왔는데, 여성들 불안감은 줄어들지 않았어요. 카메라는 계속 양산되고, 불법 수요도 이어지고…. 정부에서 규제나 수사가 미흡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 서모씨(27) “남들에 비해 무딘 편인데, 남편이 예민해서 ‘몰카 탐지기’를 사줬어요. 그걸 가지고 다닌 뒤 예민해졌습니다. 원래 익숙한 장소라도 언제든 (카메라가) 설치될 수 있는 거니까요. 국가가 여성과 남성을 차별해 수사한다는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정부에서 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불법 유포의 통로가 굉장히 많은데, 집중적으로 수사하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2차 피해가 없도록 해야 하고요.”

- 박모씨(30·대학원생) “불법촬영은 다른 범죄보다 더 만연해 있는데 (정부에서) 덜 민감하게 다뤄온 것 같아요. 그동안 성폭력 사건 수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데 여성들의 불만이 쌓여 있다가 홍대 사건이 ‘트리거(trigger·방아쇠)’로 작용해 분노가 커진 것 아닐까요.”

■ ‘페미니스트 다중’의 경고

페미니스트그룹 ‘불꽃페미액션’이 지난 19일 서울 신촌역에서 여성혐오 근절을 촉구하며 흰 장미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검찰청이 발표한 ‘2017 범죄분석’ 통계를 보면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는 지난 10년간 성폭력 범죄 유형 중 가장 크게 늘었습니다. 2007년 전체 성폭력 범죄의 3.9%에 불과했으나 2011년 7.1%, 2013년 16.9%, 2015년 24.9%로 급증했습니다. 2016년 17.9%로 증가세가 꺾이기는 했지만 발생 건수는 5000건이 넘습니다.

반면 처벌은 가볍습니다. 2016년 9월 한국여성변호사회는 2011년 1월~2016년 6월 서울 지역 법원에서 선고된 불법촬영 사건 판결 1540건을 분석해 발표했습니다.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의 형량은 5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입니다. 그런데 1심 양형을 살펴보면 벌금형 71.97%, 집행유예 14.67%, 선고유예 7.46%였습니다. 징역형 실형은 5.32%에 불과했습니다. 피의자가 재판에 넘겨진다 해도 100명 중 5명만 실형을 선고받는다는 말입니다. 벌금형 선고액도 300만원 이하가 79.97%였습니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39)는 “불법촬영 범죄로 숨진 여성의 영상을 ‘유작’이라고까지 표현하며 소비하는 게 현실인데도 사법기관은 방관하다시피 했다”며 “제도에 대한 여성들의 불신이 깊어졌다”고 진단합니다.

구조는 견고합니다.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왜 바뀌어야 하는지 알려고 노력하는 기득권 남성은 아직 소수입니다. 구조 속 여성은 달라졌습니다. 윤김지영 교수는 ‘분노하는 여성들’의 의미를 짚습니다. “한국 페미니즘은 세계 페미니즘의 물결에서 ‘제4물결’에 속합니다. 제4물결이란 인터넷을 기반으로 여성 의제를 가시화하고, 이렇게 가시화한 의제를 SNS 공간에서 토론하고 국민청원·집회 등으로 조직화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은 더 이상 추상적 학문이 아니고 여성혐오에 저항하는 일상적 생존기술이 됐습니다. ‘페미니스트 다중’이 한국 사회의 기반을 뒤흔드는 ‘혁명’의 추동력이 되고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민아 논설위원  ma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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