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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산책자]나흘간의 드라마

opinionX 2018. 5. 28. 11:33

상투적인 표현을 용서하시라. 한 편의 숨 막히는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지난주 목요일 밤 트럼프의 회담 취소 발언, 금요일 밤의 번복, 토요일의 2차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일요일 문재인 대통령의 기자회견과 트럼프의 북·미 정상회담 재확인 발언까지, 하루하루가 반전의 연속이었다. “아, 멀다구 하믄 안되갔구나” 하던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말을 실증이라도 하듯이, 판문점에 달려가 얼굴을 맞댄 두 정상의 행보는 이 드라마의 압권이었다. 남과 북은 언제라도 ‘번개’를 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는 것이다. 지리나 생태환경 등 자연 요소가 정치학의 숨은 구성원이라는 포스트모던 지리학의 주장도 있지만, 그 논지가 이런 방식으로 증명될 줄은 몰랐다. 나는 그 시간 동네친구들과 번개 모임을 가지면서 정상들도 ‘번개’를 한다는 데 대해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취소와 번복과 번개까지 동원된 지난 나흘간의 드라마를 보며 우리가 그토록 조마조마한 시간을 보낸 것은 그만큼 평화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는 방증일 것이다. 사람들은 밤사이에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싶어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호소한다. 현기증이 일 듯한 이 와중에도 상황이 돌아가는 이치에 밝은 사람들은 “내 그럴 줄 알았지!” 하고 느긋하게 기다렸다지만, 나는 그 태평을 믿을 수 없더라. 회담의 순탄한 진전을 질시하고 폄훼해온 전쟁광과 그 무리들조차 틀림없이 초조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닭 쫓던 개처럼, 제 그림자에 놀라 짖다가 먹이를 떨어뜨린 개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스스로를 배반하는 이 상황이 얼마나 미웠을까.

고백하건대 나는 TV와 책읽기의 관계 운운하는 칼럼을 일찌감치 써놓았다가 집어치우고 말았다. 내가 아무리 출판인이라 해도 이 상황에서 무슨 한가한 독서론인가.

일전에 동네친구이자 유명 칼럼니스트인 과학관 관장이 이명박, 박근혜 시대를 지나 태평시대가 오니 칼럼에 쓸 소재가 없다며 한탄하던 기억이 났다. 친구여, 그렇지 않다오. 요즘에는 공들여 쓴 글을 다음날 아침 몽땅 버릴 만큼 소재가 넘친다오. 출판인으로서는 이렇게 뉴스가 많으면 책이 안 팔릴까 걱정되지만, 그조차 즐거운 걱정일 뿐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 김정은 위원장과 그의 수하들이 쏟아낸 험한 말들과 위태로운 줄타기에 대해 할 말은 많지만, 이런 고도의 대화들을 잘 번역해서 듣는 것 또한 시청자의 자세일 것이다.

케네디 정부 시절 쿠바의 핵미사일 배치로 인해 벌어진 위기 상황을 영화로 본 적이 있다. 미사일을 싣고 쿠바로 향하던 소련 전함에 대해 군부 장성들이 선제타격을 강력하게 주장하자, 케네디의 한 참모가 일갈한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고도의 대화요! 대화를 하기 위해서 벌이는 시위란 말이오.” 군인과 정치인의 눈은 이렇게 갈리며, 우리는 정치의 임무가 무엇인지를 또 한 번 배운다.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도망갈 정치인이 마치 자신이 결사의 군인인 양 착각하는, 못 배운 정치도 있지만 말이다.

정치는 대화하는 것이다. 대화를 통해 나의 이익을 모두에게 좋은 방식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나는 엎치락뒤치락 진행되는 회담의 준비과정을 보면서, 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서라고 해석하기보다는 각자의 간절한 바람이 무엇인지를 상대에게 알리고 싶은 궁여지책처럼 느껴졌다. 남북 간의 2차 번개 회동도 그러하다. 두 사람은 다 나왔던 이야기들을 확인하는 것보다 우리는 이렇게 언제라도 만난다는 행동 하나로 뚜벅뚜벅 갈 길을 간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같이 걸어도 안심할 수 있다는 신호를 미국에 보내면서 말이다.

미국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 교수의 논평을 번역가 지인이 옮기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소개했다. “성질머리 사이코들(hot-headed paranoids)인 트럼프와 김이 핵전쟁을 시작할지도 모르는 위태한 순간에 남한의 조타석(helm)에 문재인이 앉아 있다는 사실이 세상으로서는 참 다행이다.” 현 대통령에 대한 칭송을 이렇게 옮기는 것이 낯간지럽지만, 지난 나흘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서 느끼는 소회를 한 가지만 말한다면 이것이다.

6월12일까지 아직도 보름의 시간이 남았다. 지난 며칠로 본다면 열다섯 번 뒤집힐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변치 않는 것이 있다면, 역시 우리가 대통령을 잘 뽑았다는 것이다. 나 자신 여전히 배가 고프고 문재인 대통령이 지선(至善)이 아니라 현 시점의 최선이라 생각하는 점이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잘했다. 다음 노벨평화상은 지난 촛불과 대선 투표장에 줄을 섰던 우리들이 받아야 한다.

<안희곤 |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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