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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이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 선언문 1조인 이 짧은 문장을 쓰면서 모든 사람이란 말을 반복해 되뇐다. ‘모든’에서 제외된 사람과 장소를 떠올린다. 인권을 거리와 농성장, 삶의 현장 곳곳에서 매일 외쳐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투, 청소년 참정권, 난민 혐오와 인종차별 반대, 성소수자 혐오와 차별 반대, 장애등급제 폐지를 외치는 사람들. 또 높은 굴뚝에 선 파인텍 노동자와 최근까지 청와대 앞에서 단식노숙했던 잡월드 노동자…. 인권을 말하기 위한, 지키기 위한 무수한 싸움은 칼바람 부는 12월에도 계속된다. 그리고 차별금지법은 제정이 지연된 채 11번째 겨울을 맞고 있다.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을 맞은 10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페미니즘을 다시 쓴 인권선언 발표' 기자회견에서 페미니즘으로 쓰는 인권선언 추진단 관계자들이 소수자에게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라는 내용의 손팻말을 들고 있다. 권도현 기자

지난 11월엔 1심에서 2명의 피고인이 각각 10년과 8년을 선고받았던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에 대해 2심 고등군사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2심 무죄 판결문엔 “실제로 거부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피해자의 저항을 표현하지 않는 바, 다른 폭행 내지 협박 행위는 없었던 것으로 봄이 상당하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판결문은 피해자가 일관되게 진술하는 피해 사실을 믿지 않고 왜 피해자답게 저항하고 맞서지 않았는지를 질문한다. 폭행과 협박을 협소하게 해석하며, 상명하복이란 권위적인 군 조직문화와 남성 중심으로 젠더화된 공간에서 여군이 경험해야 하는 차별적 구조를 반영하지 않은 결과다.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군대 내 성폭력 사건 사법처리 및 징계 실태에 대한 직권조사’에 따르면 군사법원이 선고한 여군 대상 성폭력 사건 173건 가운데 10.34%가 선고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는 일반법원의 1심 판결 선고유예비율 1.36%의 7배가 넘는다. 군사법원이 군대 내 성폭력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의지와 역량이 없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반면 군형법은 92조의 6에 ‘항문성교나 그 밖의 추행을 한 사람은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며 합의된 성관계일지라도 동성 간이면 범죄로 처벌할 수 있게 한다. 2017년엔 육군참모총장이 동성애자 색출을 지시하는 인권침해가 벌어졌다. 군내 성폭력은 해결하지 못하지만 성소수자는 합법적으로 색출하며 차별해 왔다. 성소수자 여군은 복합적 차별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피고인 ㄱ대위는 피해자가 동성애자인 것을 알았고 “남성을 알게 해주겠다”며 지속적으로 성폭력을 가했다. 성소수자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혐오하는 전환치료와 같은 폭력이며, 군내에서 성소수자 존재가 불법화될 때, 그가 경험하는 차별과 폭력도 정당화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계속 군인이고 싶다.” 피해자가 한 언론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럴 수 있으려면 가해자를 합당하게 처벌해야 하며, 군대도 인권에 예외없는 ‘모든’ 장소여야 한다. 군대가 인권에서 예외가 될 때 어떤 존재는 부정당하게 된다. 자신을 부정당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잃지 않으면서 계속 장애인으로, 청소년으로, 난민으로, 여성으로, 성소수자로, 노동자로 살고 싶은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치료를 강요당하지 않고, 취약하다며 무조건 보호받지 않고, 위험한 존재라고 격리당하지 않고 온전히 나로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차별금지법이 요술봉일 순 없겠지만 ‘모든’에서 제외된 사람과 장소를 당당히 드러내는 기본적인 출발점임은 분명하다.

<이진희 | 장애여성공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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