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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태하면) 신고한다. 불법인 거 알지?” KBS 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 부부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약속하고 결혼했다. 예정에 없던 아이가 생기자 아내는 임신중절수술을 받으려 한다. 병원에 나타난 남편은 아내가 뜻을 굽히지 않자 협박한다. (2018년 1월)

# “(낙태하려는 여성은) 성교는 하되 그에 따른 결과인 임신·출산은 원하지 않는 사람.”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공개변론을 앞두고 법무부가 낸 변론서다. 법무부는 “자의에 의한 성교는 응당 임신에 대한 미필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 할 것”이라고 했다. (2018년 5월)

# 보건복지부가 임신중절 수술을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포함시키고 ‘형법 270조를 위반해 낙태하게 한 경우 자격정지 1개월에 처한다’는 내용의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개정안을 공포했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수술 파업’을 선언했다. (2018년 8월)

헌법재판소가 지난 11일 형법 269조 1항(자기낙태죄)과 270조 1항(의사낙태죄)이 헌법에 어긋난다며 내년 말까지 개정하라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2012년 합헌 선고 이후 7년 만이다. 과정을 모르는 이들은 때가 되어 결정이 내려졌겠거니 여길 법하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두레박이 떨어진 게 아니다. 지난해만 해도 공영방송에서 남편이 낙태죄를 빌미로 아내를 협박하는 장면을 방영했다. 정부 부처는 낙태죄를 존치하거나 외려 강화하는 쪽에 손을 들어줬다. 낙태죄 헌법불합치는 수많은 여성이 땀과 눈물, 이론과 실천으로 일궈낸 ‘혁명’이다.

낙태죄 반대를 주장한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 뒤 기자회견을 마치며 '낙태죄 위헌'이란 문구가 새겨진 손팻말을 날려 보내는 상징 의식을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2016년 5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10~30대 여성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해 9월 보건복지부가 낙태 시술 의사 처벌 강화 방침을 밝히며 낙태죄 논란이 확산됐다. 폴란드의 ‘검은 시위’를 벤치마킹한 임신중지(낙태) 합법화 시위가 시작됐다. 2017년 23개 여성·인권·의료·노동단체 연대체인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모낙폐)’이 출범했다. 낙태죄 폐지 국민청원은 23만명의 동의를 얻었다. 2018년 들어 미투 운동과 불법촬영 규탄시위 등 거세진 페미니즘 흐름도 힘을 보탰다. 

낙태죄 폐지 운동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해온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법적 흐름에 사회운동적 흐름이 교차하며 이번 결과가 나왔다”며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은 10대, 성소수자, 저소득층 등 여성들의 차이에 주목하며 의미 있는 담론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낙태죄 폐지운동을 주도해온 ‘모낙폐’의 이유림 집행위원(32) 이야기를 들어봤다.

- 젊은 여성들의 당사자 운동이 헌재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나.

“페미니즘 대중화라는 흐름이 큰 힘이 됐다. 2012년 합헌 결정 때보다 대중을 믿고 적극적으로 이 사안을 끌고 갈 수 있었다.”

- 낙태죄 헌법불합치는 최근 대중운동이 거둔 의미 있는 성과로 기록될 것 같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낙태죄를 폐지하고 모두가 자신의 재생산권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주어’ 자리에 국가를 적어넣는 일이었다.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다’라는 슬로건을 외친 이유다. 국가와 정부는 인권, 특히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주체인데 망각해왔다. 아이 낳을 조건은 마련하지 않으면서 임신중지를 선택한 여성을 처벌하는 건 국가의 책임 회피다. 국가의 역할은 시민의 판단을 의심하고, 폄훼하며, 징벌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국가가 책임을 저버린 자리에 국가를 기입했다.”

헌재도 결정문에서 “국가는 태아의 생명 보호를 위한 사회적·제도적 개선 노력은 하지 못하면서 형법적 제재 및 이에 따른 형벌의 위하(으르고 협박함)로써 임신한 여성에 대해 전면적·일률적으로 낙태를 금지하고 있다”고 국가의 책임을 지적했다.

책임을 방기해온 국가에 제자리를 일러준 여성들 앞에 과제는 산적해 있다. 후속 입법 과정에서 치열한 논쟁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합헌 쪽에 섰던 헌법재판관 2인(조용호·이종석)의 반대의견은 시사적이다. “성관계라는 원인을 선택한 이상 그 결과인 임신·출산에 책임져야 한다. 우리 세대가 시류에 편승해 낙태를 합법화한다면 훗날 우리조차 안락사, 고려장 등의 이름으로 제거대상이 될 수도 있다.” 남성에겐 어떤 책임도 묻지 않으면서 여성에게만 형사책임을 지우겠다는 차별적 인식, 낙태 합법화에서 고려장을 연상하는 ‘상상력 과잉’이 비단 헌재 내부에만 존재하지는 않을 터다. 

다시, 국가의 책무를 물을 때다. 국회와 정부는 특정 주수(週數)를 기준으로 낙태를 제한하는 식의 협소한 논의가 아닌, 여성의 건강권과 생명권 등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방향의 포괄적 입법을 추진해야 한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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