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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대 나는 귀가 얇다. 이건 좋다더라, 저건 진짜 좋다더란 말에 귀가 팔랑거린다. 인터넷에 올라온 후기만 봐도 그런데, 직접 눈으로 본 것들에 대해서는 오죽할까. 기자라는 직업의 드문 장점 중 하나는 가고 싶은 곳에 직접 가보고, 궁금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게 때론 ‘부작용’을 낳기도 하는데 그중 하나가 ‘지름신’이다. 눈앞에서 좋은 것을 보고 나면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다.

이제까지 취재를 하면서 적잖게 ‘지름신’을 영접했다. 소소하게는 동물을 착취하지 않는 비건(vegan) 패션을 구매하고, 재활용 쓰레기 대란을 취재하다 텀블러와 손수건을 구매한 것까지. 개중에 가장 크게 지른 것을 꼽자면 단연 공동육아일 것이다. 취재차 방문했던 집 근처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게 된 것이다.

22일 서울 용산구 한국유치원총연합회 사무실이 불도 꺼진 채 굳게 닫혀 있다. 한유총은 정부가 사립유치원 감사 방침과 ‘폐원 엄단’ 등의 조치를 발표한 뒤 “비리 공무원 명단도 공개하라”며 연일 비난 성명을 내고 있다. 권도현 기자

부모가 직접 어린이집 운영과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공동육아는 꿈은 이상적일지 몰라도 맞벌이 집안에는 무리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가 배 속에 있을 때부터 국공립 어린이집에 대기 신청을 넣지 않았던 ‘게으른 부모’에 속했던 나는 공립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아파트 단지에 있는 민간 어린이집에 만족해야 했다. 심심치 않게 올라오던 어린이집 학대 뉴스에 뒷목이 뻐근해 오기도 했지만, 인상 좋은 어린이집 원장을 믿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등원을 3개월 앞둔 상황에서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마침 자리 하나가 남았다는 소식에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전국 어린이집의 10%에 불과한 국공립 어린이집에 미리 신청하는 기민함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던 터였다. 아이에게 좋은 게 나한테도 좋은 게 아니겠나, 일단 지르고 보자. 그렇게 공동육아를 시작했다.

공동육아가 쉬운 것은 아니다. 어린이집 운영과 의사결정이 민주적이고 투명하게 된다는 것, 선생님과 아이가 신뢰를 바탕으로 비교적 평등하고 민주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공동육아의 이점이다. 하지만 ‘부모의 참여와 노동’이 뒤따랐다. 지르기 전 세세하게 읽어보지 못한 약관을 마주하는 심정으로, 나는 주말과 연차를 공동육아에 투자했다. ‘이런 건 줄 알았으면…’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다는 것은 공동육아의 절대적 장점이었고, 그 장점에 나의 내적 갈등은 상쇄됐다.

최근 사립유치원 비리라는 판도라 상자가 열리면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사립유치원은 지난 대선에서 유력한 대선후보를 초청해 “단설 유치원 신설 자제”라는 엄한 소리를 하게 만들어 훅 가게 할 정도로 입김이 센 단체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박용진 의원이 등장해 사자의 코털을 단번에 뽑아버렸다. 학부모들이 낸 돈으로 명품백을 사고, 아이들 100명이 수박 한 통을 나눠먹는 등 상식 밖의 비리가 터져나왔다. 나는 분노하는 한편 가슴을 쓸어내렸다. 공동육아 때문에 수고로울지라도 이런 비리 때문에 고민할 일은 없구나. 이런 식으로 나의 ‘지름신’을 합리화하고 싶진 않았는데. 

공동육아가 이상적인 해법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동육아라는 특정한 형태의 보육 시스템이 필요 없는 현실이 이상적일 것이다. 부모의 참여 속에 투명하게 운영되는 시스템, 자연에서의 놀이가 중심이 되는 교육방식이 확대되고, 모든 보육시설이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이 되는 현실 말이다. 정부와 국회가 뒤늦게 대책을 마련하고, 비리가 터져나온 유치원에 부모를 중심으로 대책위원회가 꾸려지는가 하면 이참에 유치원 운영에 참여하려는 부모가 늘고 있다는 점은 희망적이다.

공동육아를 선택한 나나, 아이에게 해가 갈까봐 유치원 비리를 알면서도 눈감아야 했던 부모 모두 ‘아이를 위해서’라는 마음만은 같았다는 점이 서글프다. 국공립 유치원 부족, 신뢰할 수 없는 사립 유치원이란 현실이 ‘거대한 비리’로 나타났다. 이제 진정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때다.

<이영경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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