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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나. 우리는 그렇게 투덜거리곤 한다. 쥐꼬리만큼 벌기라도 하면 어디선가 나타나 세금이나 때리기에 바쁘지. 그러다가 무슨 일로 외국에 나가보면 생각이 조금 달라지곤 한다. 입국 순간부터 며칠 동안 머물 예정인지, 숙소는 어딘지 시시콜콜하게 다 밝혀야 하다니! 그냥 좀 계획 없이 놀다 가면 안되나? 자기 나라에 들어가 돈 쓰겠다는데도 출입 자체에 대해 빡빡하게 구는 그 태도가 못마땅하다. 지구인으로서 이 행성의 구석구석을 마음대로 밟을 수조차 없다는 사실은 놀랍고도 불쾌한 구석이 있다.

잠시 다녀가는 여행객과는 달리 상당 기간 체류해야 하는 유학생이나 해외 거주자는 이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안다. 어느 나라 땅에 그저 있기 위해 들여야 하는 노력과 시간과 비용은 속된 말로 장난이 아니다. 내 나라에 있을 때와 가장 구별되는 점은, 내가 이곳에 존재할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당한 목적과 이를 달성할 요건을 구비한 자에게만 ‘있을 재(在)’의 특권이 주어진다.

그렇게 돈과 능력과 추천서로 겨우 증명하여 얻어낸 체류의 권리는 기껏해야 몇 년. 얼마 지나지 않아 연장의 시점이 다가오고, 행여나 지체되기라도 하면 가만히 앉은 상태에서 범법자가 된다. 그래도 떳떳이 입국을 한 사람은 그나마 양반이다. 조국의 혹독한 실상을 피해 보다 나은 나라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많은 개발도상국 사람들은 합법적 통로가 차단되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밀입국을 시도한다. 2009년 발표된 프랑스 영화 <웰컴>은 생존과 이주를 둘러싼 고뇌를 잘 그려낸다. 주인공인 17세 이라크 소년은 새 삶과 사랑을 찾아 영국으로 밀입국해보지만,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도버해협을 수영하기로 결심한다. 우연히 만난 수영 코치의 인간애 덕에 이 허황된 꿈은 실현될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일들이 보통 그렇듯,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먹고사는 걱정 이전의 존재 자체에 대한 걱정. 비단 인간만의 신세는 아니다. 아니 인간 외의 생명이야말로 이 문제에 가장 심하게, 밤낮없이 시달린다. 도시나 마을처럼 인간계에 살면서 ‘사서 고생하는’ 종은 잠시 제쳐두기로 하자. 자연이 주민인 나라, 즉 자연계에 살고 있는데도 불법 체류자 취급을 받는 동물들에 대한 얘기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개발이나 거주 등이 엄격히 제한된 국립공원과 같은 공간은, 말하자면 동식물이 ‘원주민’으로 살 수 있도록 법적으로 구획된 공간이다. 인간은 엄연한 ‘방문자’이다. 비자에 해당하는 입장권을 잘 보유하고 법에 해당하는 등산규칙을 잘 지킨다는 전제하에서만 체류가 허락된다. 이를 위반할 경우 ‘추방’될 수도 있다. 마음껏 정상에 오르고 “야호”를 외쳐도 좋다. 하지만 천하를 얻은 듯한 마음만 가지고 돌아갈 수 있을 뿐, 산의 시민권을 얻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곳의 동물 주민들은 괴롭다. 툭하면 등산로를 벗어나 온갖 샛길은 물론 입산금지지역까지 파고드는 등산객들로 생활에 극심한 방해를 받는다. 산나무나 산약초를 불법으로 채취하여 귀한 먹이자원이 줄어들고, 함부로 던진 담배꽁초가 일으킨 산불로 보금자리가 홀라당 타버린다. 사람에게 방해를 전혀 받지 않더라도 추위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매일같이 투쟁해야 하는 야생 나라의 삶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소음과 쓰레기, 심지어는 사냥에까지 시달리며 ‘내 집’에서 사는 기분이란 어떠할까. 엄연히 방문하는 쪽은 인간인데도 ‘생태적 무법자’ 따위의 칭호가 붙는 대상은 이상하게도 동물 주민이다.

멧돼지의 경우 천적을 제거하여 개체군 조절체계를 망가뜨린 게 누군데, 우리는 그들의 번식에 불편해하며 가끔씩 민가로 내려오는 개체를 ‘불법 체류자’로 취급하기만 한다. 어렵사리 지리산에 복원시킨 반달가슴곰은 존속 가능한 개체군 수준에 겨우 가까워지려 하자, 기껏 풀어놓은 일부 개체를 다시 잡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지경이 되었다. 역시 사람 때문이다. 깊은 산속 대피소에서 삼겹살 냄새가 솔솔 풍겨도 절대로 접근해서는 안되는 줄 그 어느 곰이 알겠는가. 자신의 보금자리 근처에서 발견한 배낭과 침낭 그리고 잔반통을 ‘습격’한 죄로 이 곰은 ‘자연적응 실패’라는 억울한 누명과 함께 포획당할 가능성에 처해버렸다. 정해진 길로만 다니면 곰을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는데도 말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곰 위치정보 2만개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탐방로변 10m 이내에 머무르는 비율이 0.5%에 불과했다. 자기 집에서도 눈치를 보며 생존하는 이 동물들은, 공단의 복원기술부장 이배근 박사의 말마따나 상을 줘도 모자랄 판이다. 적어도 동물의 나라인 숲에서만이라도 이들의 행복추구권과 거주이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야생학교는 변론한다.


김산하 | 영장류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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