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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다만 불편할 뿐이다.’ 이 말을 믿었다. 불편만 감수한다면, 돈이 없어도 누구나 자신만의 삶을 꾸려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돈이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다르다. 돈은 세상을 조종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돈 많은 대기업들의 영향력을 보면서다. 특히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이 많이 든다.

며칠 전 판결이 하나 나왔다. ‘이마트는 대형마트가 아니다’라는 서울고법의 판결이다. 재판부가 이렇게 판단한 이유 중 하나는 이렇다. “시장경영진흥원이나 소상공인진흥원의 조사 결과는 영업 제한에 우호적인 단체가 단기간 조사한 결과인 반면, 연세대 정진욱·최윤정 교수가 집필한 ‘대형 소매점 영업 제한의 경제적 효과 분석’은 광범위한 조사를 거친 객관적, 과학적 연구 결과로 신빙성이 높다”는 것이다. 정진욱·최윤정 교수는 한국체인스토어협회의 의뢰로 연구를 진행했다. 이 협회는 이마트·홈플러스·롯데마트 등 대형마트 운영사들이 회원사로 있는 단체다. 재판부가 처음부터 대형마트 편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형마트들이 연구에 훨씬 많은 돈을 쓴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준정부기관인 시장경영진흥원이나 소상공인진흥원의 예산이 많지는 않을 테니까.

지난달 13일 대법원은 쌍용차의 정리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구조조정의 근거인 긴박한 경영상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한 2심 재판부의 판단은 뒤집혔다. 쌍용차는 이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대법관 출신 2명, 서울고등법원장 출신 등 19명의 변호인단을 선임했다.

지난해 봄 양승태 대법원장이 기자들과 함께 등산을 했다. 그는 기자들에게 “제발, 법원이 보수적이라고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판결이 나오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의미로 생각했다. 잘못 생각한 것 같다. ‘보수적인 판결이 나올 수밖에 없으니 이해해달라’는 얘기였던 것 같다.

돈 많은 대기업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곳곳에 돈을 쓴다. 얼마 전 정윤회씨 관련 청와대 문건이 대기업의 ‘정보맨’에게 넘어간 사실이 확인됐다. 이들 ‘정보맨’은 공무원들과 만나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고 협조를 구하기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수십명의 ‘정보맨’을 둔 기업도 있다고 한다. 언론사를 갖고 있는 대기업들도 있다. 돈의 힘은 정부 부처에, 학계에, 법원에, 연구소에, 언론사에 알게 모르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손님을 빼앗겨도, 일자리를 잃어도 의지할 곳을 찾기 힘들다.

지난 6일 서울 양천구 신정동 성당에서 열린 ‘쌍용차 해고자들의 특별한 은퇴식’에서 김승태씨(왼쪽)와 박일씨가 후배들로부터 받은 꽃다발을 안은 채 웃고 있다. (출처 : 경향DB)


날씨가 춥다.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가 떠오른다. 굶주린 성냥팔이 소녀가 추운 거리에서 성냥을 팔지만 아무도 사주지 않는다. 소녀는 꽁꽁 언 손을 녹이기 위해 성냥을 켠다. 소녀는 성냥의 불꽃 속에서 환상을 본다. 난로를, 맛있는 음식을, 크리스마스트리를, 그리고 할머니를. 날이 밝은 뒤 사람들은 미소를 띤 채 죽어 있는 소녀를 본다.

지난 13일 새벽 쌍용차 해고노동자 김정욱과 이창근이 평택공장의 굴뚝에 올랐다. 높이 70m의 굴뚝이다. 이들은 말했다. “우리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굴뚝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약하고 무서움 또한 많고 여린 인간인지를 알리기 위해 올랐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이들이 바라는 것은 많지 않다. “사측에 당장 뭘 해달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얘기 좀 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6년째 내밀고 있는 손을 이젠 잡아줬으면 한다”고 말한다.

18일 평택의 최저기온은 영하 10.3도였다. 밖에 나가본 사람들은 그들의 고통을 이해할 것이다. ‘성냥팔이 소녀’의 결말은 보고 싶지 않다. 땅에 내려와 환하게 웃는 그들을 보고 싶다. 그리고 돈보다 힘이 센 것이 있음을 보고 싶다.


김석 비즈 n 라이프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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