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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기준법상 기업주가 정리해고를 하려면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어야 한다. 이때 긴박함이란 그저 ‘어려우니까 양해해달라’고 해서 될 일은 아니다. 실직은 한 사람, 한 가족을 절망으로 밀어넣는다. 명백한 ‘필요’를 입증해야 하고 기업의 객관적 사정은 회계장부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2009년 쌍용자동차의 정리해고 당시 회계장부는 부실투성이였고 앞으로 자동차를 더 생산하지 않을 것이란 비현실적 가정으로 손실을 부풀렸다. 이는 지난 2월 서울고등법원이 밝혀낸 ‘사실’이다.

노조 측 회계사와 변호사들이 집요하게 파고들어 수년간의 법정 공방을 벌인 끝에 인정된 것이다. 그런데 하급심의 법 적용이 온당한지만을 따져야 할 대법원이 이 ‘사실’을 뒤집어버렸다. 정교하고 치밀하게 구체적인 숫자를 하나하나 짚어 엉터리 회계가 밝혀졌는데도, 대법원에서는 ‘국제 금융위기’ ‘경기불황’ ‘경쟁력 약화’ ‘판매량 감소’ 등을 들어 긴박한 경영상 필요를 인정했다.

대법원이 적시한 정리해고의 근거들은 당시 정황이긴 하지만 결정적인 잣대가 아니다. 복잡한 수학 문제를 밤새워 풀어 답을 내놓았더니, 구체적 설명 없이 그저 “그 답은 아닌 것 같다”고 덮어버린 격이다.

쌍용차 해고자 2명이 평택공장 안 굴뚝 위에 올라간 지 일주일째다. 이들은 판결을 납득할 수 없고, 또 포기할 수가 없다. 6년을 싸워온 강건한 노동자들이지만 요새는 자꾸 눈물이 새어나온다. 격한 어조로 회사를, 정부를, 사법부를 성토하던 이들이 이제는 “제발 손을 잡아달라”고 읍소하고 있다. 굴뚝에 오르던 날, 한 해고자는 40대의 나이에 암으로 숨졌다. 정리해고 이후 해고자나 그 가족의 26번째 죽음이다. 죽음의 행진을 멈출 수 있는 것은 복직뿐이라고 보기 때문에, 함께 살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극한의 지대에 올랐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김득중 지부장(왼쪽)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김영주 총무(오른쪽)와 18일 오후 서울 명동의 한 음식점에서 대화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근로기준법상 사용자는 신규 채용 시 해고된 근로자를 우선 고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 내년 1월이면 신차 ‘티볼리’가 출시되고 일손이 추가로 필요할 것이다. 쌍용차 대주주인 마힌드라그룹의 아난드 마힌드라 회장은 지난해 “법적 결과에만 의지하지 않고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큰 틀에서 복직 문제를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아난드 회장은 ‘티볼리’ 출시에 맞춰 내년 1월12일쯤 방한해 공장 안 기업노조와 해고자 복직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다.

충격적인 상황도 몇 차례 반복되면 무감해지는 경우가 있다. 고공농성을 다시 생각해본다. 쌍용차 굴뚝 위는 “폭이 1m쯤 되고 걸어보면 열여덟 발 정도” 되는 공간이다. 지붕이 없어 비가 오는 날은 속옷까지 흠뻑 젖는다. 최악의 혹한 속에 있다. 두드려패는 듯한 바람에 몸은 휘청거리고 굴뚝은 흔들려 멀미를 일으킬 정도다. 하루에 한 번씩만 저녁에 식사가 올라오기 때문에, 아침과 점심은 얼음밥을 삼켜야 한다. 귀가 날짜를 기약할 수 없고, 고통에서 벗어나 쉴 시간은 허용되지 않는 곳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공장 안을 바라본다. 고공농성 중인 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정책기획실장은 “회귀본능처럼 공장 안 동료들에게 찾아왔다. 회사와 기업노조가 올려주는 밥을 먹으며 조금이나마 가까워졌다고 느낀다”고 했다. 일주일 만에 공장 안에서도 “내미는 손, 꼭 맞잡아 줍시다”라는 제목의 유인물이 돌기 시작했다. 부실한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제 그들은 ‘긴박한 생존상의 필요’를 쥐어짜듯 외치고 있다. 이창근 실장은 영하 10도의 얼음 같은 새벽에 굴뚝을 꾸역꾸역 오르면서 “서러웠다”고 했다. 언제까지 이 서러움을 칼날 같은 겨울바람 앞에 방치해 둘 것인가.


박철응 |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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