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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십 년도 더 한결같이 비정규직 철폐 싸움을 하고 있는 기륭전자 노동자들을 ‘가노을빛’ 그런다.

가노을빛이라니…, 서로 사랑하고 있건만 만날 길이 없어 한 번도 속내를 내대보질 못하다가 문뜩 들녘에서 마주쳤을 때 저도 모르게 바알갛게 달아오르는 얼굴빛을 일러 가노을빛 그런다.

그 빛은 그 어떤 하늘빛하고도 다르다. 들녘의 갖가지 꽃닢하고도 달라 그림으로도 아니 드러나는 빛이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간직하고 있고 따라서 절로 피울 수도 있는 빛이라, 그 누구도 이를 짓이겨선 안 된다는 순결과 거룩의 상징이다.

그러니까 2008년 캄캄한 새벽녘이었다. 송경동 시인으로부터 기륭전자로 와달라는 전화가 왔다. 어제도 갔었는데 또? 송 시인의 숨이 먼저 넘어가는 듯해 달려가니 그 캄캄한 새벽에도 눈이 어지러웠다. 밥 안 먹기(단식) 94일째 되는 김소연의 목숨이 어려웠건만 웬일로 얼굴만큼은 바알갛게 피어오르고 있질 않는가 말이다. 나는 무릎을 쳤다. 저건 얼씨구 가노을빛이라고. 죽음 바로 한 발 앞서서야 해방을 만나 피는 가노을빛이라고.

그런 가노을빛의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오늘부터 또다시 배밀이(오체투지)로 청와대까지 가겠다고 한다. 놀랄 일이다.

2010년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끈질긴 싸움 끝에 노사합의를 사회적으로 매듭지어 복직이 되었다. 다만 회사 측에서 2년 반만 시간을 달라고 해 꼬박이 그 약속을 지킨 뒤 출근을 했으나 일거리도 안 주고 돈도 한 푼 안 주고.

그러니까 만인이 환호한 사회적 합의를 노동자들에겐 단 한마디 말도 없이 깨고, 법의 판결도 찢어발기고, 그 모든 사람됨의 합리성도 갈기갈기 찢겼지만 꾹 참고 몇 해째 출근을 했다.

하지만 이참엔 회사가 없어지고 회사 건물도 다른 사람의 것으로 된 유령의 집에서 외로이 버티다 못해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이제 거리로 나서되, 배밀이로 나선다는 것이다. 주먹도 아니 쥐고 촛불도 안 들고.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는 22일 오전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기륭전자 농성장을 정리하고 비정규직 법.제도 폐기를 선언하는 기자회견문을 발표 했다. 이와함께 사회적 투쟁을 선언하고,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요구하는 '오체투지' 행진을 청와대까지 시작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그러나 그네들의 결단엔 늘어졌던 기운이 퍼뜩 든다.

첫째, 비정규직은 노예라는 지적이다. 알다시피 노예란 자유권은 말할 것도 없고 생존권과 생명권이 없는 존재, 노동의 모든 창조성을 말살당한 꼭두각시다. 그런 900만 비정규직이 노예라고 하면 누군가가 나서 깨트려야 하는 게 문명사적 사명이 아니겠는가.

둘째, 그들은 복직이 아니라 아예 비정규직 제도를 폐기하라는 것인데 이것은 곧 오늘의 자본축적의 틀거리를 깨자는 것이다. 때문에 달걀로 바위치기라고 할지 몰라도 이건 가능, 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일구어야 할 문제로 들고 나온 것이다.

그렇다, 기륭전자 노동자라고 해보았자, 가시나 아홉, 머슴아 하나, 모두 열 명. 그들이 이 압도적인 착취구조를 바탕으로 한 박근혜 독재의 부조리를 타파할 수가 있을까.

나는 그 가능성을 기륭전자의 순결, 가노을빛에서 찾는 사람이다. 올바르고 아름다울 것이면 저도 모르게 두 볼이 바알갛게 달아오르는 그 가노을빛, 그것마저 짓밟힐 것이 뻔해 이제 때는 왔다고 혀를 차본다.

그림 좋아하는 이들과 사진가들은 그 가노을빛을 실상으로 꾸려내야 하지 않을까. 시인과 소설가들은 그 가노을빛을 살아있는 살티(생명)로 빚어내고, 소리꾼들은 가노을빛의 염원을 노래로 꾸리고, 춤꾼들은 그 가노을빛을 산 형상으로 어기차게 구현하고, 연극인들은 이 현실을 무대처럼 살리고, 철학과 학문은 이 썩어문드러진 자본주의 문명을 해체·청산하는 데 앞장서고, 사람들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 하고 부르던 그 가슴으로 이 가노을빛을 길라잡이로 굽이치게 해야 하질 않을까.

그렇다, 이참 거짓된 빛으로 멀미져온 우리 인류는 저 기륭전자의 가노을빛을 시대의 횃불로 삼아야 하리라고 믿는다.


백기완 | 통일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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