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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끈이주걱, 벌레잡이식물

보름 정도는 밤마저 너무 더워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을 때 비가 내려 고마웠는데 보름이나 이어지니 그것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오랜 비 그친 뒤의 더없이 맑은 하늘을 결국 마주하고 있습니다. 참 좋은 날입니다. 깨끗한 하늘을 조금이라도 가까운 거리에서 만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높은 산에 오릅니다. 정상에 오른 뒤, 다 품을 수는 없겠으나 하늘 향해 두 손 활짝 뻗어보려 했는데 계획을 바꿔야 하겠습니다. 아름다운 들꽃과 나무가 발걸음을 쉽사리 옮기지 못하게 합니다.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고산습지까지만 다녀와야겠습니다.

자연에 깃들인 생명은 아무리 혹독한 환경에 놓일지라도 끝까지 생명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저들이 생명을 놓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을 눈여겨보면 쉽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더욱이 뿌리를 땅에 묻고 있기에 모든 환경의 변화를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식물이 환경의 변화를 견뎌냄은 물론 끝내 극복해내는 모습을 보노라면 이리저리 편한 곳으로만 파고드는 나 자신이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식물은 빛에너지를 이용하여 두 가지의 무기물, 곧 잎을 통해 흡수한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와 뿌리에서 흡수한 물로부터 탄수화물이라는 유기물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길을 찾았습니다. 무기물로부터 유기물을 만드는 것이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엄청난 능력입니다. 하지만 물과 이산화탄소만으로 온전히 식물이라는 생명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16종류의 원소는 필수적으로 흡수해야 하는데, 그중에서도 질소는 단백질과 핵산의 합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대기는 무려 78%가 질소이지만 안타깝게도 그 많은 질소를 직접 이용할 수 있는 생명은 몇몇 세균뿐이며, 식물이 간접적으로라도 대기 중의 질소를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질소고정세균과 공생하는 아주 좁은 길뿐입니다. 할 수 없이 식물은 토양으로부터 질소를 흡수해야 하는데, 토양에 있는 질소의 공급원은 식물과 동물의 사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물의 사체에서 비롯하는 유기물 형태의 질소 역시 식물은 바로 흡수를 못합니다. 이때 유기물 형태의 질소를 식물이 흡수할 수 있는 무기물 형태로 바꾸어 주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토양에 서식하는 세균과 균류들입니다.

습지는 대체로 강한 산성을 나타냅니다. 유기물 형태의 질소를 무기물 형태로 바꾸어 주는 토양 미생물이 서식하기 힘든 환경입니다. 결국 습지는 원초적으로 식물이 서식하기 어려운 환경인 셈입니다. 그럼에도 습지에는 여전히 식물이 무성합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식물은 이 난관을 헤쳐 나가는 것인데, 그중에 벌레를 잡아 소화시켜 벌레의 질소 성분을 흡수하는 식물을 벌레잡이식물 또는 식충식물이라고 합니다. 벌레잡이식물은 전 세계에 600여종이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끈끈이귀개과 2속4종, 통발과 2속7종으로 모두 2과4속11종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벌레잡이식물의 주요 서식지는 볕이 잘 드는 고산습지입니다. 서식환경이 워낙 독특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벌레잡이식물을 만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나마 개체수가 많은 것은 끈끈한 물질을 분비하며 생김새는 주걱을 닮은 끈끈이주걱입니다. 끈끈이주걱이 곤충을 유인하고, 포획하고, 소화시키는 일은 잎에 나있는 선모(腺毛)가 담당합니다. 붉은 빛깔의 작은 루비 알갱이가 방울방울 달려 있는 것 같은 선모 끝에는 끈끈한 점액이 묻어 있습니다. 끈끈이주걱을 ‘Sundew’라고 부르는 이유는 선모의 모습이 마치 태양이 이슬로 맺혀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붉은 보석에 현혹된 벌레가 오목한 주걱에 달라붙으면 가까이 있는 선모부터 구부러지면서 벌레를 감싸기 시작합니다. 벌레를 완전히 감싸는 데에는 6시간 정도가 걸립니다. 벌레를 감싼 선모는 이제 더 이상 끈끈한 점액을 분비하지 않고 벌레를 소화시킬 소화효소를 본격적으로 분비하기 시작합니다. 적어도 6종류의 소화효소를 분비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중에는 단백질 분해 효소와 키틴 분해 효소가 있어 곤충의 껍질과 날개까지 모두 소화시킵니다. 이렇게 선모와 잎을 통해 흡수된 소화산물은 토양에서 얻을 수 없는 양분을 대신 채워줍니다.

벌레잡이식물이 벌레를 잡고 또 그를 소화시켜 얻은 양분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독특한 식물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토양으로부터 양분을 얻을 수 있는 정상적인 길이 있는데도 그 길을 버리고 다른 생명체인 곤충을 잡아 허기를 채우는 것은 아닙니다. 곧 저들이 곤충을 취하는 것은 자신을 갉아먹는 곤충에 대한 보복이라기보다는 습지라는 특별한 환경에서도 살아남고자 하는 강한 생명력의 발현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 만난 끈끈이주걱은 내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생명체에게 스스로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강한 욕구가 없다면 그것을 더 이상 생명체라 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지난주, 서남대학교 폐교에 대한 1차 계고가 있었습니다. 학사일정은 예정대로 이뤄져야 하기에 개강을 했습니다. 교육부의 생각대로라면 교수로 사는 마지막 학기입니다. 개강 첫 시간이었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목이 터져라 수업을 했습니다. 한 학생이 뒤따라 나오며 묻습니다. “우리도 알 만큼 알고 있습니다. 교수님들 급여는 2년이나 밀려 있고, 학교는 곧 문을 닫습니다. 우리야 다른 학교로 가지만 교수님은 직장마저 잃으실 텐데 어디서 이런 열정이 나오시나요?” 미소 한 번 짓고 짧게 답합니다. “너희들이 아직 여기에 있잖니.”

<김성호 | 서남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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