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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는 ‘기념비전’이라는 현액이 걸린 전통 양식의 건물이 있다. 조선시대에 비석을 보호하는 건물은 모두 비각(碑閣)이라 했지만, 이 건물 안에는 황제를 기리는 비석을 두었기 때문에 이름의 위격(位格)도 비전(碑殿)으로 높였다.        

비석에는 후일 순종황제가 되는 당시 황태자의 글씨를 받아 ‘대한제국대황제보령망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송(大韓帝國大皇帝寶齡望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頌)’이라고 새겼다. 이 비석과 비전을 세운 해는 1902년으로 고종이 즉위한 지 40년, 나이 51세가 되던 해였다. ‘망육순’은 60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시쳇말로는 ‘내일 모레 환갑’이다. 몇 해 전에 그 나이를 지낸 처지에서 말하자면, 이건 결코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기념비전 뒤 교보빌딩 자리에는 조선 개국 초부터 1909년까지 기로소(耆老所)라는 관청이 있었다. 하는 일이라고는 소속 관원의 명부를 작성, 관리하고 봄가을로 연회를 여는 정도밖에 없었지만, 조선후기 법전인 <대전회통>에는 관부 서열 1위로 기재되었다.     

조선시대 관리들은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을 평생의 영예로 여겼으니, 입소 자격을 얻기가 아주 어려웠을뿐더러 같은 자격이 되면 왕도 관리들과 함께 입소했기 때문이다.            

입소 자격은 ‘2품 이상의 전·현직 문관으로서 나이 70 이상일 것’이었다. 왕도 70이 되지 않으면 입소할 수 없었으나, 입소 자격을 얻을 때까지 살지 못하는 왕이 많아지자 스스로 ‘노인’이 되었음을 선언하고 입소하는 왕도 나타났다. 숙종은 59세에, 영조는 51세에 각각 기로소에 입소했다. 고종도 영조의 예를 따라 51세에 입소하면서 즉위 40년이 된 것과 ‘자칭 노인’이 된 것을 백성들과 함께 경축했다. 그의 생일과 즉위기념일은 1902년의 ‘쌍대 경절(慶節)’로 지정되었다. 남들보다 일찍 ‘노인’이 되는 게 뭐가 그리 좋아서 국경일로까지 삼았을까?

중세의 노인은 현대의 노인과 달랐다. 60이 되면 양인 남성이 의무적으로 부담해야 했던 군역과 요역에서 면제되었다. 환갑잔치는 이제 더 이상 억지로 끌려 나가 힘든 일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음을 기념하는 자축연의 의미도 지녔다. 노비도 80이 되면 ‘면천(免賤)’의 은전을 입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퇴물 취급받지도 않았다. 노인들이 평생에 걸쳐 쌓아올린 식견과 기능은 사회적으로 유용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관습과 지식이 변하는 속도는 그보다 더 더뎠다. 노인이 되면 국역에서 면제되었을 뿐 아니라, 가정과 지역사회에서 훈계 들을 의무로부터도 해방되었다. 대신 ‘훈계할 권리’는 거의 무한정 허용되었다. 그러면서도 자식들에게 봉양 받을 권리를 누렸고, 자식들 역시 부모 봉양을 당연한 의무로 여겼다.          

옛날 노인들도 겸사로 “늙으면 죽어야지”라는 말을 쓰기는 했으나, 노인의 기대수명이 다른 연령층의 기대수명보다 압도적으로 짧지는 않았다. 노인이 돼 보지도 못 하고 죽는 사람이 태반이었으며, 영·유아 사망률이 노인 사망률보다 오히려 높았다. 흰머리가 늘어가고 기력이 쇠하는 것이 서글픈 일이기는 했으나, 노인이 되어서 ‘좋은 점들’이 그 서글픔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현대의 노인은 기대수명이 훨씬 늘어났다는 점 말고는 옛날 노인의 ‘좋은 점’을 거의 누리지 못한다. 그들이 평생에 걸쳐 쌓아온 지식과 기능은 경륜으로 대접받기보다는 ‘시대착오’로 취급받기 일쑤다. ‘어른의 훈계’였던 말들은 ‘꼰대의 잔소리’로 격하되었다.            

야간에 근무하는 경비원으로 노인을 모집하면서 시급 2000원을 제시한 공고문은, 현 사회가 노인의 몸과 경륜에 내리는 냉정한 평가다. 노인들 스스로 “늙을수록 지갑은 열고 입은 닫아라”라는 경구를 만들어 실천하려 하지만, 그것도 열 지갑이 있는 노인들에게나 해당될 뿐이다.

부모 봉양의 의무를 이행하려는 자식과 부모의 노후자금조차 노리는 자식 중 어느 쪽이 많은지는 알 수 없으나, ‘봉양’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미해진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죽을병’이 ‘안 죽을병’으로 자리를 옮긴 덕에 수명은 길어졌으나, 병마와 함께하는 세월도 길어졌다.

그럼에도 현대의 노인들은 과거의 노인들에게서 ‘노인 노릇’을 배운다. 학문 체계가 고도로 세분화한 시대에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는 격이다. 젊은 부모들을 위해서는 ‘좋은 아빠 되는 법’이나 ‘좋은 엄마 되는 법’ 같은 교육 프로그램이 풍성하나, 노인들에게 제공되는 교육 프로그램은 거개가 단순한 소일거리일 뿐이다. 노인이 되면 응당 누릴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권리들은 사라지고, 대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고통스럽고 고독한 시간 앞에 선 사람들이 현대의 노인이다. 게다가 그들은 ‘희소한 존재’가 아니라 인구수가 가장 많은 세대를 구성한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시대 변화에 조응하는 ‘노인다운 삶’에 대한 개략적 합의조차 이루지 못했다.

고령시대에 제기되는 문제들은 복지비용이나 노인 일자리에 국한되지 않는다. 노인들 스스로 옛날 노인들처럼 살았다가는 시대와 심각한 불화를 겪다가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나머지 사회 구성원들도 노인들을 다른 사회적 약자를 품듯이 품어야 한다. 산업화와는 달리 고령화에 대해서는 후발 주자의 이점도 누릴 수 없다.       

우리는, 그리고 세계는, 인류가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새롭고도 엄중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 도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관념, 태도, 관습, 문화 전반을 혁신해야 한다. 산발적이고 비연속적인 노인문제 담론들을 생산하기에는 고령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지금은 고령시대의 문제 해결을 국가적 의제로 삼고 역량을 집중해야 할 때가 아닐까? 독립된 정부 부처로 ‘노인부’를 신설할 필요는 없는지, 신중하게 검토했으면 한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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