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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이화여대 석좌교수


 

적어도 지금의 시점에서, 대통령 선거에 나서려는 여러 후보 지망자들의 정책들은 차이보다는 공유하고 있는 바가 두드러진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그것은 사회 현실에 부딪힘에 따라 또 정책을 맡는 지도자에 따라 천지의 차이로 다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두드러지는 것은 여야를 막론하고 복지사회 체제를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을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성장 과실의 보다 공정한 분배 그리고 그것을 위한 체제의 정비가 다음 정권의 과제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후보자들의 견해이기도 하지만, 두루 일반화된 생각이기도 하지 않나 한다. 많은 사람에게 한국사회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는 느낌이 들게 된 것이다. 맹렬하게 앞을 향하여 나아가다 보면, 일단 멈추고 몸을 추스르고 앞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시간을 멈추고 공간을 둘러 살피는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활력과 피로 또는 기분의 리듬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고, 사람의 삶의 구조 속에 들어 있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이데거의 대표 저작 제목은 <존재와 시간>이다. 여기의 존재와 시간은 더 일반화하여 공간과 시간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사람의 삶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 우주 만물의 존재에서 기본 축을 이루는 것이 공간과 시간 또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거대한 물리 현상만이 아니라 사람의 삶에서도,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고 죽고, 학교에 가고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얻고, 계절의 리듬에 따라 농사를 짓고 또는 하루하루 일하면서 아침에 나가고 저녁에 들어오는 것-이 모든 것은 시간의 리듬 속에 움직인다. 이러한 시간의 축에 더하여, 집, 동네, 고향, 도시, 나라 또는 학교 직장 등-이러한 것들은 삶의 터전으로서의 공간을 말한다. 


우리가 잘 깨닫지 못하는 것은 시간을 나누어 쓰는 것보다도 어려운 것이 이러한 공간을 확보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부족하고 비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참으로 부족한 것은 진정한 공간이다. 그리하여 공간은 사람의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시간 속에 행하게 되는 사람의 일은 이 공간을 얻거나 보다 좋게 만들려는 노력이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존재는 사람에게 신비스럽게 드러나는 근원으로 생각되지만, 보통의 삶에서 느끼는 공간에 대한 향수도 이에 대한 작은 예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사는 곳 어디에나 있는 것이 공간이지만, 시간에 쫓기다 보면 참으로 머물 수 있는 공간은 허용되지 않는다. 계속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삶, 특히 현대 사회의 삶이다. 작업의 시간은 사람의 삶의 거의 모든 것이고, 일이 급하다보면 공간은 스쳐지나가는 시간의 부속물에 불과하다. 옛날 농업사회에서 일 하는 것은 익숙하게 느낄 수 있는 공간에서 일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이 삶의 신진대사 속에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자신의 직장이 옛날의 토지에 비슷하게 삶의 유기적 총체의 일부가 되는 수는 많지 않다. 그것은 잘 알 필요도 없고 익숙해지지도 않는, 스쳐지나게 되는 정류장일 뿐이다. 그것은 영상물 속의 공간에 비슷하다.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저서에서 한나 아렌트는 나치즘이나 공산주의의, 즉 전체주의의 역사철학은 과정의 철학으로서, 역사나 사회 과정을 일정한 입장에서 파악하고 그것에 따라서 사람의 삶--모든 사람의 삶을 동원할 수 있다는 철학인데, 그것은 과정에 빠져들어 존재의 경이로움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고 말한 일이 있다. 존재의 경이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전체주의만이 아니다. 모든 정치적인 동원은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을 따라 ‘빨리 빨리’ 움직이면서 어떤 공간에도 머물지 못하게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루소가 교육을 논하면서 가졌던 고민의 하나는 어린이의 오늘의 행복과 미래를 지향하는 교육의 목표를 어떻게 적절하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돈을 벌기 위해서 또는 성공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일은 공간에 체재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그리고 성공의 그래프에서 모든 공간은 시간 속에 이루어지는 소득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만을 갖는다. 그래서 집과 땅은 부동산이 된다.


(경향신문DB)


여기에 대하여 자연은 예로부터 그 자체로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자연으로부터 소유와 권리를 분리하기는 쉽지 않지만, 적어도 심리적으로 또 자연산수의 관점에서, 옛날에는 자연을 향한 사람의 마음까지도 사회와 정치에 완전히 지배되는 것은 아니었다. 산수화가 말하여주는 것은 정치나 사회에 복무하라는 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공간-그에 맞설 수 있는 존재의 차원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화조(花鳥)와 호접(胡蝶) 같은 자연물도 사람으로 하여금 복무의 시간으로부터 돌아갈 수 있는 휴식의 공간이 있다는 것을 상기하게 하였다.


사회를 공동체로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을 생존을 뒷받침해주는 튼튼한 공간으로 생각하자는 것이다. 오늘의 도시화는 공간을 물리적으로는 넓어지게 하지만, 안정된 생활의 공간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뿔뿔이가 된 사람들이 내비게이션으로 길을 찾고 인터넷으로 지인(知人)을 만들어 가는 곳이 현대적 도시 공간이다. 출세의 사다리를 찾고 그것을 올라가려는 것도 비슷하게 인위적 공간을 만들어보려는 몸부림이다. 복지제도가 튼튼해지고 사회적 유대가 공고해진다면 이 공간은 조금 더 안정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을 여러 외적인 복무로부터 완전히 풀어내주지는 못한다.


사회적 약자라는 말이 있다. 약자의 편을 들고 약자를 돌보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것을 설득하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그것은 사회적 불균형을 시정하는 데에 중요한 지표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운 공간은 그것을 넘어간다. 돈이 없고 권력이 없으면 약자인가? 약자라는 말 자체가 시체(時體)의 가치 기준을 받아들인 것이다. 릴케의 초기 시에는 어려운 사람들의 참상을 간단히 요약하려 한 시들이 있다. 이들 시에 관계하여 그는 한 편지에서 자신의 의도를 설명한 일이 있다. 다른 사람의 형편을 개선하려고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상황을 잘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그는 이렇게 말한다. 시인 스스로가 상상해낸 인물의 속셈을 알기도 어렵거늘, 자신의 한계 안에 갇혀 있는 타인이 이것을 알아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가 자기 시에 그렸던 거지나 난쟁이는 자신의 마음에서 만들어낸 틀에 맞추어 주조(鑄造)해낸 것들이다. 이 틀의 자료는 그들의 신세를 바로잡자는 희망으로부터 추출된 것이 아니다. (물론 타자에 대한 공감이 자연스러운 인간 본성의 일부라는 것을 그는 인정한다.) 시인은 그러한 의도 때문이 아니라 그들만의 개체적인 운명 그것을 기리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를 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이 기림을 위한 시적 집중이 시인으로 하여금 근본적인 진실에 이르게 한다. 두려운 것은 정상인이라는 규격에 맞추어 난쟁이의 키를 늘이고 거지를 부자가 되게 하겠다는, 새로 교정되는 세계이다-릴케는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말은 보수 반동의 발언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각자에게는 정치와 사회의 틀을 넘어, 그만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한다. 난쟁이를 잡아 뽑아 규격화하려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는가? 거지가 일용할 양식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모든 사람이 존경하고자 하는 사람은 스스로 거지가 되기로 결정한 사람-무소유의 수도자가 아닌가?


우리 사회는 이제 공동체적 유대의 강화 필요성에 동의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현실이 되게 하려면 물론 여러 정책적 조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환은 조금 더 넓은 의미에서 편안한 공간을 만드는 일로 고쳐 생각해볼 수 있다. 이제는 앞으로 바삐 나아가는 일보다도 사람이 편할 수 있는 공간-물리적, 사회적 그리고 초월적인 공간이 사람의 사람됨을 용이하게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가 된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필요하다면, 이러한 공간의 마련에 그것이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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