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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 | 이화여대 석좌교수

대중매체에 보도되는 사건들을 쫓다 보면, 저절로 종말론자가 될 수 있다. 세상이 곧 끝장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큰 사건은 시간이 지나면서 큰 사건이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것에 상관없이 신문 매체의 보도는 신속해야 하고 또 현실에 직접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어야 한다. 좋든 나쁘든, 이것은 매체의 생존 조건의 하나이다. 그러니 이번 칼럼도 조금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야기하려는 것은 시간이 조금 지난 독일 정치 이야기이다.


지난 3월18일에는 독일에서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여야 여러 당의 합의로 후보가 된 요하힘 가우크 목사가 대통령 선출대회에서 절대다수의 표를 얻어 당선됐다. 그는 당선 직후에 당선 수락 연설을 하고 다시 3월23일에는 국회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취임 연설을 했다. 정치 연설이란 대체로 당대의 상투구를 짜깁기한 공허한 수사이기 쉽다. 가우크 대통령의 연설들이 그러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는 내용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 체제의 기본을 확인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의미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정치에 권력 투쟁이 있게 마련이라는 것은 인간 현실의 하나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거기에 비방과 폭로와 욕설-우리의 경우에는 공공 공간의 엄숙성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막말들이 오고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정치의 존재 정당성은 그것이 보여주는 사회 윤리 그리고 정치 원리에 있다. 가우크 대통령의 연설의 핵심은 이것을 확인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사실 독일에서 상기할 필요가 있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나라들이 공유하는 원리들이다.

독일이 당면한 여러 과제들을 철학적인 또는 일반적 관점에서 두루 언급하고 있는 가우크 대통령의 연설에서 되풀이되는 주제는 자유이다. 민주주의가 자유의 이념에 기초한다는 것은 새로울 것이 없다. 독일의 언론에서도 이것을 진부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논평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확인될 필요가 있는 민주주의의 기초인 것은 틀림이 없다. 동독에서 살면서 교회활동을 하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가져온 정치 운동에 참여한 바 있는 가우크 대통령에게 자유의 주제는 특별한 개인적인 의미를 갖는다. 수락 연설의 첫 마디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요일”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자기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날인 3월18일을 두고 하는 말 같지만, 사실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처음 민주 선거가 있었던 1990년의 3월18일을 가리킨 것이었다. 그 때의 선거는 동독인들로 하여금 처음으로 자유로운 시민이 되게 하고, 자신들이 주권자로서의 국민이며 독일이 자기 나라라는 것을 깨닫게 했던 감격적인 사건이었다. 현존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감이 커져 가는 마당에 가우크 대통령은 개인적인 체험을 회고하여 민주정치의 이념을 다시 다짐하고자 한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자유만으로 국가가 바로 설 수는 없다. 자유는 정의의 짝이 돼야 한다. 취임사에서 그는, “자유는 정의의 조건, 정의는 자유의 조건-자유와 자기발전을 누리는 조건으로” 하나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정의가 전체주의적인 명령으로 확립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의가 무엇을 의미하며 정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는 진지한 민주적 토의와 토론으로만 결정될 수 있다. 그러면서 정의는 자유의 수호를 위한 조건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가 정의로운 사회질서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되면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는 쇠퇴할 수밖에 없다.

토의가 어떻게 되든, 그가 생각하는 바 정의에 대체적인 테두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정의란 우선적으로 사회정의를 말한다. 정의로운 사회는 소외나 빈부 격차를 방치하지 않고, 국외자(局外者)가 사회 변두리에 버림받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 노인, 장애자를 돌보고, 사회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이다. 또한 정의롭다는 것은 평등만이 아니라 성장하는 아이들이 자신의 재능을 한껏 발휘할 수 있으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과실을 기대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입지를 향상할 수 있게 하는 사회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후자, 사회적 유동성에 조건이 되는 것은 정의에 못지않게 자유이다. 가우크 대통령이 이 후자를 새삼스럽게 강조하는 것은 동독 출신으로서의 정치적 체험에서 나오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의를 “자유와 자기발전의 조건”이라고 두 가지로 규정하는 데에도 그러한 뜻은 들어 있다. 그는 공산주의 체제가 설정하는 정의를 긍정적인 눈으로 보지 아니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 집단을 강조하는 계획들이 “자유” “삶의 즐거움” “법치의 안정성” “복지”를 줄어들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지적한 일이 있다.(소책자, <자유를 위한 호소>) 그에게 “대의민주주의는 집단 이익과 공동의 복지를 고르게 하는 일에 적정한 유일한 정치 체제”이다. 그것이 완전하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좋은 점은 그것이 “새로운 배움의 능력을 가진 체제”라는 것이다. 자유는 새로운 배움을 위한 조건이다.

물론 개인적 자유를 그가 절대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독일의 기본법이 규정한 “사회국가”이다. 그것은 자유와 정의를 하나로 묶어 놓고자 하는 체제이다. 강제적 정치 질서를 거부하고 자유를 옹호하면서도 정의의 질서를 확보하려 할 때, 중요한 것은 책임의 개념이다. 책임은 자유와 정의를 하나로 이어줄 수 있다. 그것은 정치에서 논의되고 법률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로 도덕적 윤리적 개념이다. 독일사회가 이주민을 포용할 수 있는 다원적 사회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면서, 가우크 대통령은 국가는 이제 민족의 운명공동체가 아니라 정치적 윤리적 가치공동체라고 주장한다. 국가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 정치라면, 그것은 가치를 옹호하고 창조하는 수단이라야 하고 윤리에 의해 뒷받침돼야 한다.

거꾸로 여기의 가치란 정치적 의미를 가진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개인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사회정의와 참여와 사회적 유동성”을 보장하려는 일을 가리킨다. 흔히 정치의 숨은 동기로 작용하는, “불안과 원한과 부정적인 계획”들로 하여금 정치를 이끌게 하지 말아야 한다. 그가 소망하는 것은 “자유와 평화와 유대”가 하나가 되는 사회이고, “우리의 자손들에게 이것이 우리나라라고 물려줄 수 있는” 나라이다.

가우크 대통령은 그의 취임사의 마지막에서 이러한 이상을 위해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대통령으로서의 그 자신에 대한 신뢰, 정치적 윤리적 책임을 담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 그리고 국민에 대한 신뢰를 당부한다. 가우크 대통령은 그가 말하는 정치 이상이 유럽의 전통--고대 희랍, 법에 의한 정치, 그리고 유대로부터 내려오는 기독교의 전통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전통을 새삼스럽게 말하는 것은 독일이 서구의 민주주의 전통에서 오랫동안 이탈했던 사실과 오늘날 유럽 공동체의 위기적 상황을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과제와 전통을 달리 하는 나라에서 반드시 민주주의의 이상과 현실이 같은 것일 수는 없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 이상은 민주주의 국가에 두루 해당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자유와 정의 그리고 윤리적 책임을 버리고서는 민주주의가, 가우크 대통령의 표현을 빌려, “인간 생존의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가능성의 하나”로 남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 정치 현실은 어떠한가? 거기에서 자유와 정의의 이상과 책임과 윤리 그리고 삶의 위대한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가? 이것은 이상이기도 하면서 현실 정치의 현장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오늘의 우리 정치 공간에서 이러한 높은 가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을까? 가장 천박한 싸움터가 된 듯한 정치 공간에 절망하면서도, 총선일 투표소로 가는 사람들의 고민은 이러한 민주주의의 이상의 관점에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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