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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


프랑스에서는 대통령 결선 투표가 지난 일요일에 있었다. 이 글이 신문에 실릴 즈음에는 그 결과가 이미 알려져 있을 것이다. 지난 수요일에 있었던 TV 토론 후의 여론조사는 여야 두 후보의 지지율이 46.5% 대 53.5%라고 한다. 지지율이나 신문 논평들로 보아 사르코지 대통령이 낙선하고 올랑드 후보가 당선할 확률이 크다고 하겠다. 재임 중의 대통령이 재선되지 않은 것은 드문 일로서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했던 1981년 이후 처음이고, 올랑드 후보가 당선된다면, 사회당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미테랑 대통령 퇴임 후 17년 만이라고 한다. 이번에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그런 대로 안정돼 있던 정국의 교체를 요구할 만큼 프랑스인들의 위기의식이 커졌다는 말일 것이다.

유럽연합의 유로 구역에서 그래도 위기를 잘 버텨나가고 있는 것이 독일과 프랑스인데, 현시점에서 위기는 프랑스에도 압박을 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경제성장이 느려지고, 실업자 수가 500만에 이른다고 한다.(TV토론에서 올랑드 후보가 이 숫자를 600만이라고 했다가 사르코지 대통령의 신랄한 교정을 받아야 했다.)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는 연초에 프랑스의 국가신용평가를 AAA에서 AA+로 내렸다. TV 토론에서 사르코지 대통령은 그래도 프랑스의 형편이 그다지 나쁘지 않고 위기가 거의 지나갔다고 했다가 올랑드 후보에게 호된 공박을 받았다.

경제가 나빠지면 다른 모든 것들에서도 문제가 일어난다. 경제가 정치의 중심에 놓이지 않을 수 없다. 사르코지 대통령의 정책이 긴축을 기조로 하는데 대해, 올랑드 후보는 성장에 역점을 둬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어느 쪽이나 자신의 정책을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가령, 사르코지 대통령이 균형예산 달성을 2016년까지 하겠다는데 대해, 올랑드 후보는 그 기간을 2017년까지로 잡는다. 올랑드 후보는 6만명의 교사 증원을 포함해 일자리 창출을 급선무로 하겠다고 한다.(그 돈이 어디에서 나오느냐에 대해 경제학자들을 포함해 여러 군데에서 논란이 있었다.)

프랑스의 한 유권자가 대선 1차 투표 용지를 받고 있다. l 출처:경향DB

 

눈에 띄는 올랑드 후보의 제안 하나는 100만 유로 이상의 소득에 75%, 45만 유로 이상의 소득에 45%의 세금을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사르코지 대통령도 세금 기피를 위한 자본의 해외 이동을 규제하고, 부가세나 사회보험세 인상 등 세입 증가를 위한 다양한 조치를 취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두 후보는 이러한 민생 경제 외에 EU 관계, EU 중앙은행 채권 문제, 대독 관계, 이민자 문제 등 많은 사항들을 토의와 정책의 과제로 내놓고 있다. 이러한 자세한 프로그램들은 국가의 필요와 국민의 생활 현실에 섬세하게 대응하려는 진지하고 현실적인 노력이라는 인상을 준다. 물론 입시 문제에 답하듯 문제를 만들고 정답을 내놓는 것이 지도자의 자격을 결정한다고 할 수는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면밀한 정책에 못지않게 말의 무게 속에 드러나는 사람의 무게이다.

수요일의 토론은 거친 전면대결의 인상을 주었지만, 그전의 여러 보도들에 의하면 올랑드 후보는 우리 식으로 표현해 ‘물렁팥죽’ 또는 부드러운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사르코지 대통령은 프랑스인들이 기대하는 대통령으로서의 위엄을 갖추지 못한 경망한 사람으로 보였다고 한다. 영국 BBC의 해설은 출마를 결정할 무렵, 올랑드 후보는 자신에게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하나는 몸이 비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머를 너무 즐긴다는 것이라고 했다. 최근에 와서 체중을 줄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심각한 정치 이야기를 하다가도 유머에 빠져드는 습관은 버리지 못했다고 한다. 영국 논평자들은 그에게 미스터 나이스(상냥한 사람) 또는 미스터 노말(보통 사람)이라는 별명을 붙인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우왕좌왕씨(Mr Zigzag) 또는 반짝씨(Mr Bling-bling)라고 한다.

분명한 이슈 대결이 프랑스의 정치 풍토이고 유권자를 결정으로 이끄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삶의 현실에 관련된 분명한 정책의 제시인 만큼, 호인(好人)이라는 인상이 유권자들의 결심에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닐는지 모른다. 그러나 올랑드 후보가 상승세를 타게 된 데에는 정책 이외에도 사람들이 그에게서 느끼는 인간적 친밀감이나 신뢰감이 작용한 것일 수 있다.

우리 정치에서는 분통을 터뜨리는 욕지거리, 막말, 비웃음, 사실 비틀기 등으로 사람의 감정을 끓어오르게 하는 것이 정치 전술이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감정적인 흥분 또는 무의식에 쌓인 억압의 배설과 같은 것이 긴 관점에서 정치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의 삶의 무게를 잘못 헤아리는 일이다.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삶의 현실의 무게이고, 그것을 정확하게 설명해내는 언어이다. 이 설명은 다시, 그것이 갖는 인간적 의미로 인하여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깊은 인간 인식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이라야 한다.

올랑드 후보가 이번의 TV 토론에서 사르코지 대통령의 분열주의에 대항해 자신은 국민과 국가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봉공정신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격투 장면들은 그가 소문만큼 합리적이고 섬세하고 깊이있는 사람인가하는 데 대해 의심을 가지게 했을 수 있다. 마주 앉아 공을 치고받게 하는 짧은 대결형식의 탁상토론도 문제였지만, 대결의 격투장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정치인지도 모른다.

얼마 전 자라 바겐크네히트 독일 좌파당 부당수가 저서를 출간했는데, 그 일부 내용이 독일 신문에 소개됐다. 바겐크네히트 부당수는 동독의 공산당(통합 사회주의당) 당원이었다가, 지금은 좌파당의 국회의원이 된 정치인이다. 그는 대학에서 헤겔과 마르크스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았다. 그의 저서가 자본주의 비판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인물이나 사례들이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넘어간다는 점이다. 그의 관점에서는 2차대전 후의 새로운 유럽 이념은 ‘사회 시장 경제’였다. 이러한 유럽의 건설에 공헌한 인물에는 드골 대통령 그리고 독일의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경제상이 포함된다. 에르하르트는 전후 서독의 ‘경제 기적’을 이끌었고 기회균등과 사회보장으로써 “모든 사람의 복지”를 지향하는 새로운 사회의 기초를 닦았다.(바겐크네히트는 공산주의자로서 출발하였음에도 전후의 서구체제를 긍정적으로 본다.)

이러한 새로운 유럽의 이념의 바탕에는 유럽의 문화 전통--소포클레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전시대의 희랍 철학과 문학에서 비롯된, 그리고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쉴러, 데카르트, 헤겔 등에 의해 계승된 유럽의 정신문화가 있다고 한다. “모든 인간 사회 가운데에서도 희랍인들은 인간의 삶에 대해 가장 아름다운 꿈을 꾸었던 사람들”이라고. 괴테의 말을 바겐크네히트 여사는 기억해내고자 한다. 그러나 이 ‘삶의 꿈’은 이제 주제가 아니다. ‘정신과 예술과 민주주의’가 아니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제가 오늘의 인간의 관심사이다.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유럽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사랑, 사회유대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 등 인간의 최선의 특성들을 시들게 하고, 최악의 특성--소유욕, 이기심, 사회적 몰지각만을 막무가내로 자라나게 하는 사회는 인간의 이름에 값할 수 없다”--바겐크네히트 여사는 오늘의 자본주의 체제를 이렇게 비판하여 말한다. 그리고 새로운 유럽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이러한 주장에 언급하는 것은 거기에 독창적인 통찰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은 아니다. 놀라운 것은 젊은 좌파 정치인이 사회와 인간의 존재 방식에 대한 이러한 깊은 문화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의 대통령 후보들이 적어도 TV 토론 등의 인상으로는, 최고의 문화의식, 윤리의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발언들은 공공성의 기준을 잃지 않은 정치공간에서 전개되는 정책 제안이다. 이제 대선을 향해 가면서 우리 정치 논쟁의 모양은 어떤 것이 될 것인가? 적어도 정치공간의 위엄 손상을 방지하고 그 수준을 높게 유지하는 것이 지금의 시점에서 여야 좌우를 넘어 정치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기본적인 의무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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