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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중국의 혁명가이자 대문호인 루쉰은 세상을 뜨기 한 달 전쯤, 죽음이라는 제목의 산문을 남겼다. 일종의 유언장인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의 장례절차에 관한 당부와 함께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일곱 가지 항목으로 남겼다.

장례식 때 돈을 받지 말고, 그 어떤 기념식도 하지 말고, 그저 빨리 자신을 땅에 묻어 치우라 말한 후, ‘나를 잊으라, 그리고 살아가라’ 했다. 이 말은, 이제 곧 흙으로 돌아가게 될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뒤의 문장, 그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삶을 살아가야 할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서일 터이다. 그러니까 이 문장이 말하는 것은 ‘잊으라’가 아니라 ‘살아가라’이다.

가족에게 혹은 홀로 남겨질 연인에게 남긴 유언이라면, 아프고 슬프고, 아련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쉰의 이 유언은 그가 사랑했던 지인들에게뿐만이 아니라 치열했던 그의 시대에 바친 헌사이기도 했다.

루쉰이 살았던 시대, 그리고 루쉰이 죽은 후에도 한동안 비통하게 이어질 고난의 시대는 ‘전쟁과 같은’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전쟁의 시대였다. 일본의 침략이 있었고, 봉건세력과 혁명세력의 투쟁이 있었고, 수많은 죽음이 있었다. 그러므로 잊으라 하는 것은, 그리고 살아가라 하는 것은, 한 개인의 죽음에 대한 추억과 회한에 젖을 사이 없이 밀고 나가라 하는, 거친 시대와 무고한 죽음들에 맞서 끝까지 싸워라 하는 말이었을 터이다.

루쉰의 유언은 또 이렇게 이어진다. 타인을 다치게 하고도 관용을 이야기하고, 보복은 나쁘다고 말하는 자와는 가까이 하지 말라. 풀어 이야기하자면, ‘너의 눈을 뽑고 너의 이를 피에 물들게 하고도 용서를 말하는 자, 그래놓고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아서는 안된다며 관용을 말하는 자’에 관한 일갈이다. 다시 말하지만 당시는 전쟁의 시대였다.

뤼쉰은 그의 소설 <광인일기>에서 당시를 식인의 시대로 묘사하기도 했다. 봉건주의의 유습과 외침으로 인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나라를 사람들이 잡아먹히고 있는 시대의 풍경으로 묘사한다. 머지않아 자신도 잡아먹히고 말리라는 두려움 속에 광인이 되어가는 주인공의 가장 큰 공포는 자신 역시 누군가의 살점을 먹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먹히는 순간 그 시대의 일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소설의 말미에서 말한다. 약간 부드럽게 의역하여 옮긴다.

“아직도 무사한 아이들이 있을까? 아이들을 구하라.”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 이 시대에 ‘식인하는 자’는 어떻게 의역될 수 있을까. 나라를 한꺼번에 집어삼켜 먹어버린 자, 거짓말하는 자, 속과 겉이 다른 자, 뻔뻔한 자, 인면수심인 자, 기막히게 하는 자, 욕 나오게 하는 자…. 너무나도 뻔뻔하게 인면수심으로 속과 겉이 다르게, 기막히게, 욕지기가 나오게 거짓말을 하는 자….

루쉰의 이 글이 압권인 것은, 일곱 개 유언의 항목 뒤에 무심한 듯 덧붙인 첨언에 있다. 유럽 사람들은 임종 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 죄를 용서받고자 하며, 또 자신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한다고 하더라는 말을 한 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할까 스스로 묻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렇게 결심했다. 그들이 나를 증오하게 하라. 나도 결코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이 구절을 두어번 소리내어 읽다보면, 이 짧은 문장이 마음을 울리는 순간이 있다. 그렇구나, 홀로 소리내어 말하게 될 때가 있다. 그렇구나. 용서하지 말아야 할 일은 용서하지 말아야지. 용서받을 수 없는 자는 끝까지 용서하지 말아야 하지. 그렇게 하지 못했던 일들 때문에, 어쩌면, 내가, 어쩌면 누군가가 깊이 병들고 아팠겠구나. 용서하지 말아야 할 일에 용서를 종용받고, 용서하고 싶지 않은데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용서가 되어 있고, 용서한 일이 없는데도 어느새 용서가 되어 있는, 그런 세상을 내가, 누군가가 살았겠구나. 우리 모두가 살았겠구나.

연말이다. 누구나 사랑을 이야기하고, 용서를 이야기해야 할 때이다. 세상이 상식대로 돌아간다면, 적당히 문제도 있고 적당히 상처도 있겠으나 크게 어긋남은 없게 돌아가고 있다면, 맞다, 우리는 용서를 이야기해야 한다. 실은 사랑을 이야기하기에도 바빠야 한다. ‘나를 잊고, 살아가라’는 100년 전 대문호의 유언이 연인의 이야기쯤으로 들려, 문득 가슴저리다가 또 다독다독 마음을 위로받아야 마땅하다. 혹은, 유언이 아니라, 새로운 한 해를 기약하는 나 자신의 다짐처럼 여겨지면, 그래서 올해의 나빴던 일은 다 잊고 내년은 다시 잘 살아봐야지, 여겨지면 더 좋을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 해의 끝, 그리고 아마도 내년까지 우리는 ‘용서하지 않을 일’ ‘용서하지 말아야 할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될 듯싶다. 너무나 많은 것들에 대해. 거짓말하는 자, 뻔뻔한 자, 인면수심인 자, 악독한 자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품고 있는 구조에 대해서도. 우리가 담겨 있는 그릇, 우리를 등쳐먹고, 한입에 삼켜버리기 좋게 만들어놓은 그릇, 우리를 ‘용서조차 못하게 만드는 사람들’로 만든 그 그릇에 대해서 말이다.

다행히, 이 모든 일들이 지나고 나면 세상의 많은 부분들이 변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촛불은 축제의 역사가 되고, 정치는 무서움을 알게 될 테고, 우리는 용서하지 않는 일의 힘을 알게 될 테니. 그 날이 머지않았다고 생각되어 이 춥고 어수선한 연말이 오히려 따듯하다. 모든 게 다 촛불을 들어준 사람들의 힘이다.

그래서 오히려 희망찬 이 연말, 모든 분들께 루쉰의 또 다른 소설 <고향>의 한 구절로 인사를 대신한다.

“희망이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 본래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걸어가는 사람들의 많은 발자국으로 만들어지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땅 위의 길과 같은 것….”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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