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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한국 사회는 어느 시간을 살고 있는가?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다거나, 국가가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다가 군부대에 감금한 채 폭력을 가한다는 것은 2015년 현재를 사는 한국인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다. 경찰관들이 무고한 시민을 고문하고 죽인다거나, 이들을 수사하던 검사가 고문에 참여한 경찰관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덮어둔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로 치부된다.

1980년 6월 이완구 경정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내무분과위원회에 파견됐다. 내무분과위는 악명 높은 ‘삼청교육대’ 사건에 관여했다. 국보위는 사회정화를 한다며 영장도 없이 6만여명을 붙잡아 4만여명을 군부대로 끌고 갔다. 당시 20대였던 이 경정은 국보위 근무 공로로 훈장을 받았고, 2015년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됐다.

1987년 1월 박상옥 검사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수사에 투입됐다. 박 검사는 3월 초 선배 검사로부터 고문 경찰관이 구속된 2명이 아니라 5명이라는 사실을 들었다. 박 검사가 알고도 묻어뒀던 사실은 5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폭로됐다. 당시 4년차였던 박 검사는 훗날 검사장이 됐고 2015년 대법관 후보자로 지명됐다.

공교롭게도 1980년대 전두환 군부 정권 시대의 시작과 끝을 알린 사건에 깊이 연루됐던 두 사람은 “20대의 경정에 불과했다”(이 총리 후보자)거나 “막내 검사로서 지휘를 받는 입장이었다”(박 대법관 후보자)고 말한다. 새누리당도 국보위에 참여했던 고위 인사들이나, 박종철 사건을 맡았던 다른 검사들에게는 별다른 문제제기가 없었는데 이제 와서 막내급인 두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과하다고 말한다.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1930년대 독일을 전근대·근대·탈근대적 요소가 공존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 사회라고 분석했다. 그는 비동시성 세계의 사람들이 “같은 시간에 살고 있으나, 같은 시간 속에 살고 있지 않다”고 썼다고 한다. 앞의 시간은 달력 위의 시간을, 뒤의 시간은 역사적 시간을 말한다.

삼청교육대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축소는 1980년대 당시에도 엄청난 국민적 공분을 샀다. 그럼에도 이·박 후보자의 선배들이 이후 별탈없이 고위 공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군부 정권의 유산이 남아 있었고, 그 시대와 그들의 경력 사이의 객관적·주관적 비동시성이 상대적으로 작았기 때문이다. 이제 1980년대와 2015년은 달력의 시간으로도, 역사의 시간으로도 거리가 멀어졌고 비동시성은 커졌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삼청교육대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됐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크다는 것은 그 사회의 내적 모순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다. 이런 사회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비동시성을 동시화하려는 운동이 나오게 된다. 동시화 방식은 논리적으로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현재를 과거로 돌리거나, 현재 시간에 남아 있는 과거를 지우거나이다.

민가협, 박종철기념사업회, 민변 등 사회단체 회원들이 4일 서울 종로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임명 동의 철회를 촉구하는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블로흐에 따르면 1930년대 독일의 중산층 시민들은 전자를 택했다. 결과는 나치정권의 득세였고 유례없는 재앙을 낳았다. 1980년대 군부 정권의 대표적인 인권유린 사건에 깊숙이 관여했던 사람들이 2015년 총리가 돼 행정부를 지휘하고, 사법부 최고기관의 재판관석에 앉는다면 그렇지 않아도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큰 한국 사회의 모순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역사적 시간을 현재의 달력 시간에 가깝게 맞출 수밖에 없다는 답이 나온다. 1980년대의 ‘막내’를 자처한 이·박 후보자가 역사에 기여하는 것은 총리·대법관이 되는 게 아니다. 역설적으로 그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는 게 한국 사회의 비동시성을 동시화하는 데 기여하는 길이다. 블로흐가 말했듯 ‘과거 시간의 찌꺼기’는 지양(止揚)돼야 한다.


김재중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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