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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진정성’이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서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정치가들의 토론에서도, 기업의 면접시험에서도 진정성의 잣대는 어김없이 거론된다. 특히 정치인들이 서로를 향해 진정성이 없다고 공격하는 장면은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도 애용자들이다. 대북강경책을 정당화하는 근거도 결국 북한의 진정성 부재라고 한다. 끝 모르게 터져 나오는 정책 실패와 인사 사고, 그리고 소통부족을 비판할 때도 반응은 한결같다. 진정성이 없는 쪽은 늘 타자일 뿐이다. 자신은 진정성을 가지고 대하는데, 상대가 없다거나 또는 오해한다는 프레임이 작동한다. 진정성을 제대로 봐주지 않아서 억울하다고까지 한다.

이런 사고체계와 해석에는 심각한 함의가 있다. 진정성은 속이지 않고 모든 것을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것인데, 의미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용례다. 미셸 푸코는 그리스·로마의 철학자들을 인용해 진정성이란 권력자나 가진 자가 입맛대로 휘두르는 무기가 결코 아니라고 말했다.

반대로 이는 약자나 가난한 자가 이 말을 함으로써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용기를 가지고 권력을 향해 진실을 요구하는 외침일 때만 쓸 수 있는 단어라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빈번하게 사용되듯이 강자의 과시욕 수단이 될 수 없으며 이미지 정치를 위한 수단이거나 정치 공학적 이익의 맥락에서 사용하기는 부적절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당면한 현실은 정반대다. 박근혜 대통령은 항상 자신이 질문자이고 국민도, 북한도, 다른 정치인도 모두 그의 추궁에 대답해야 하는 대상일 뿐이다. 진정성의 원래 의미인 가감 없는 진실의 기준에서도 문제가 많지만, 적절한 용례에서는 더 크게 결격이다. 하기야 대통령 자신의 정치철학에서 진정성이 정말로 중요한 가치였다면 애초부터 스스로를 판단하는 근거로 사용해야지, 국민들을 추궁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진정성의 잣대는 결코 비전이 아니라 권력의 도구였다는 결론으로 회귀한다.

사실 고대철학자나 푸코의 말도 인용할 필요조차 없다.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진리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국민이 물어야 한다. 우리가 묻고 대통령이 답해야 한다. 대통령은 지난 2년간 권력을 행사함에 있어 과연 진정성이 있었는가라고 우리가 추궁해야 한다.

필자를 포함한 국민들의 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그런데도 왜곡과 부재 외에 그 어떤 것도 발견하기 어려운데, 자기중심적 원칙주의 콤플렉스만 난무한다. 신뢰 프로세스에는 과정이 없고, 복지에는 복지가 없고, 소통에는 상대가 없다.자의 것이 내용이 없는 것임에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상대의 잘못이라고 여전히 주장한다는 것이다.

70퍼센트가 넘는 국민들이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자기 정당성만 얘기하는 지독한 관성은 모두로 하여금 견디기 힘든 절망감을 느끼게 한다. 지금까지 질문을 던질 때마다 미안해 했더라면, 부끄러워했더라면 상황은 달라도 아주 달랐을 것이다. 그래서 시간을 더 준다 해도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기 어려워졌다. 결국 우리는 지금 매우 어리석은 질문을 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까지의 인사청문회에서도 당사자들의 진정성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출처 : 경향DB)


오늘날 한국정치는 시간이 갈수록 허상이 진실처럼 위장된다. 프랑스 사회학자 보드리야르는 실재보다는 눈에 보이는 기호나 상징이 진짜 사물을 대체하는 현상을 지적했다. 그의 말은 진정성을 독점하려는 현 권력의 실체에 대한 얼마나 적합한 진단인가를 보여준다. 이미지란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실체가 없는 이미지가 실체를 대신하고 현실을 지배한다. 그런데 이미지가 가지는 효용성도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조짐이 시작되었다.

기자들을 상대로 니들도 ‘한번 당해볼래?’라고 거리낌 없이 소리 지르고, 처음에는 부인하다가 들통이 나자 ‘그게 뭐 어때서?’라고 반응하는 총리 후보자는 여전히 그가 묻고 우리가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그 뒤에는 수첩 속의 왜곡된 진실만을 고집하며 여전히 영원한 질문자로 남겠다는 비뚤어진 권력이 있다. 많은 이를 짧게 속일 수 있고, 몇 사람을 오래 속일 수는 있으나, 많은 이를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는 링컨의 말처럼 진정성 여부는 종국에 드러날 수밖에 없다.


김준형 | 한동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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