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한국 정치사를 무수하게 수놓으며 명멸했던 정당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특징이 있다. 현재의 여야를 비롯하여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새’, ‘신(新)’으로 시작하는 정당명이 유독 많다는 점이다. 변화와 쇄신, 개혁과 혁신을 부르짖지 않은 정당이 없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를 가장 극적으로 요약한 문구는 현재 새누리당 대표실 배경에 보이는 빨간색 바탕의 슬로건일 것이다. “보수는 혁신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선거와 정치가 과거에 대한 전면적 부정을 통해서만 가능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지난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는 노무현 정권과의 연속성을 부정했고, 박근혜 후보는 이명박 정권과의 연속성을 부정했다. 임기말이 되면 여당은 으레 레임덕 대통령의 탈당을 원하고, 새 정권은 리셋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정부조직을 새로 짜느라 고심한다. 아마 우리 정치사에 가장 많이 인용된 잠언은 그래서 “새 술은 새 부대에”일 것이다.
눈을 돌려 우리 정부와 행정을 돌아보면, 현란할 정도의 변화와 개혁이 도처에 난무한다. 불과 몇 년 되지 않은 기간에, 우리는 좌측통행에서 우측통행으로 보행습관을 바꿔야 했고, 새로운 주소체계에 적응해야 했으며, 바뀐 연말정산 시스템에 혼란스러워했다. 8월에 새로운 우편번호체계가 도입되고, 정부의 최종적 개혁은 행정구역 개편이라는 말에 이르면, 그 변화의 급진성에 입을 다물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 여당과 정부가 좀 더 변화에 조심스러운 보수였으면 좋겠다. 나라의 운영이 종합상사 기획아이템을 내는 것과는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와 행정이 연속성을 가지고, 어제의 성공과 실패의 경험이 내일의 점차적인 개선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점진주의 모델의 주장은 그래서 귀담아들을 만하다. 정치는 매우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지는 행위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들이 합의에 이르는 것은 매우 어려우며, 정책적 판단을 위한 정보는 언제나 부분적이기 때문이다. 정책은 언제든지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으며, 현실의 질서로 구현되는 순간 제도적 생명력을 가지게 되어 다시는 원점으로 되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사유와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파괴되고 창조되어야 할 것이라면, 정치와 행정에는 돌다리도 두드리며 걷는 지혜가 필수적일 것이다. 우리 정치는 불행하게도 이것이 뒤바뀐, 돌다리처럼 굳은 사상으로 끊임없이 과거를 파괴하고 제도를 창조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이런 리셋 노이로제에는 아마 시민들의 팍팍한 현재의 삶과 밝지 않은 미래에 대한 전망도 한몫을 하고 있을 것이다. 너무도 답답한 오늘과 내일을 완전히 바꾸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 원인인 과거를 소거하고 모든 것을 리셋한 후 백지 상태에서 새로운 세상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 그런 마법의 리셋버튼이 어디 있는가. 정치가 마켓팅이라면 그런 리셋 이미지를 팔고 있을 따름이다. 마치 지난 2년 동안 행정안전부가 안전행정부로, 다시 노무현 정부 시기의 행정자치부란 이름으로 회귀한 것처럼 실제로는 리셋이 아니라 리사이클(재활용)인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를 비롯한 의원들이 9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에 참배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우리 정치사의 비극은 그런 의미에서 과거 유산의 전면적 부정을 통해서만 미래의 전망을 그리고자 한 데 있었다. 과거 정부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비판이 아니라 봉인과 폐족을 통해 현재가 근근이 잔존하고, 늘 새롭게 원점에서 ‘수레바퀴를 재발명’하는 과정을 반복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손쉬운 해답은 역사책에 있다는 것, 지난 정부의 성과와 고민을 받아들이고 계승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난제들-개헌, 복지, 외교, 북한 등-을 백지 위에서 풀기 시작할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전두환 정권의 복지정책과 노태우 정권의 외교정책과 김영삼 정권의 제도 개혁과 김대중 정권의 북한정책과 노무현 정권의 개헌 논의를 반추하고 그 공과를 평가하고 연구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만 역사가 정치인들이 두려워하고 관료들이 참조하며 시민들이 투표장에서 되새기는 실체로 살아나지 않을까. 역사가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번에는 희극으로 반복되는 이 악순환의 과정을 빠져나올 수만 있다면 우리 정치는 오늘이 한국사에 어떻게 남게 될지를 비로소 두려워하게 되지 않을까.
박원호 |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
'정치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동칼럼]진정성은 우리가 묻고, 대통령이 답해야 (0) | 2015.02.12 |
---|---|
[사설]새누리당은 ‘이완구 임명동의안’ 단독 처리 말라 (0) | 2015.02.11 |
[사설]이완구 ‘총리 자격 없음’ 확인한 인사청문회 (0) | 2015.02.10 |
[기고]노무현은 무죄였다 (0) | 2015.02.09 |
[사설]‘박근혜 복지 공약’ 폐기·축소는 국민 배신 아닌가 (0) | 2015.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