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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좀 기이한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애도하는 사람>이라는 일본 소설이었는데 주인공은 어떤 사적인 계기로 죽은 사람에 대해 잘 애도하는 것이 살아있는 사람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낀다. 그래서 구도의 길을 떠나는데 그 구도의 길이란 잘 애도 받지 못한, 혹은 잘못 애도 받은 죽은 사람을 찾아다니며 애도하는 것이었다. 자세한 줄거리는 잊어버리고 참 특이하다는 인상만 남은 이 소설의 제목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세월호 사태 때였다. 세월호 사태 이후 수년간 우리는 말 그대로 애도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애도를 방해·억압하였고, 우리는 애도를 완성하기 위해 그것을 방해하고 억압하는 박근혜 정부에 항의하며 평화로운 방법으로 싸웠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애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성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도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내-존재’라고 했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어떤 관계 속에 놓여 있고 그 관계를 떠나서 있을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애도한다는 것은 죽어서 이 관계로부터 떨어져 나간 사람 자체를, 그 사람이 왜 어떻게 이 관계로부터 떨어져 나갔는가를 생각하는 것, 그 사람이 떨어져 나감으로써 기왕의 관계에 생긴 공백을 성찰하는 것, 그 공백을 넘어서기 위한 관계의 조정과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것을 뜻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매우 과거 지향적인 애도가 사실은 매우 미래 지향적인 행위임을 알 수 있다.

세월호 사태 당시 우리 국민은 매우 성숙한 의미에서 ‘애도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 국민은 300명 가까운 아이들 죽음의 원인이 극단적이라 할 만큼 인간을 경제 성장을 위한 수단과 도구로만 보았던 한국 산업사회 시스템, 그 시스템의 생명경시에서 비롯된 것임을 성찰하였고, 천만이 넘는 애도의 촛불을 통해 그 비인간적 시스템의 상징적 종언을 의미하는 정권교체를 이루어냈다.

최근에 나는 <애도하는 사람>이란 소설 제목을 다시 떠올릴 기회가 있었다.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 간의 논쟁이 치열했던 지역 교육정책 토론회에서였다. 그 지역에서 참여한 청중 중 한 분이 발언권을 얻더니 뜬금없이 “애도하는 기간의 차이일 뿐입니다. 익숙한 것들이 사라져 갈 때 애도의 기간이 많이 필요한 사람도 있고, 적게 필요한 사람도 있고 그런 거죠”라고 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여서 대체로 웬 아닌 밤중에 홍두깨야 하는 분위기였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작금의 현실을 정확하게 짚은 말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관계 속에 놓이고, 그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이 애도하는 것은 죽은 사람만이 아니다.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한 사람이 맺고 있는 관계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인간은 이 변화 속에서 사라져가는 익숙한 관계들을 애도하며, 그 애도의 기간에는 개인과 개인 간에, 집단과 집단 간에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이 애도 기간의 차이는 사회변화 속도가 느릴 때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사회변화 속도가 빠를 때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아마도 지금의 한반도 상황이 전형적으로 그러할 것이다.

핵폐기와 종전, 평화협정을 지향하는 남북정상회담, 북·미 회담의 급진전은 그간 우리 사회의 관계를 상당 정도 규정해왔던 이념적 대립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그 대립을 과거 익숙했던 관계에 대한 애도 기간의 차이로 희석시키고 있다. 남북관계는 갑작스럽게 그 결과가 나타난 것뿐이지 내용적으로는 냉전체제 해소 이후 꾸준히 애도가 이루어져왔기 때문에 큰 갈등은 없어 보인다. 대부분의 국민은 다행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 냉전체제에 대한 애착이 지나치게 긴 소수가 좀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정도이다. 그래도 평화체제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헌법적 가치 등을 조정하는 데는 만만치 않은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앞으로 애도기간의 차이로 갈등이 많아질 영역은 일자리와 관련된 문제로 보인다. 산업사회 시스템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거나 완전히 사라질 것은 아니기 때문에 좋은 일자리를 늘리려는 노력은 필요하겠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예컨대 인공지능 자동화로 인한 고용노동 시스템의 종말을 예언한 프랑스의 기술 철학자 베르나르 스티글레르의 주장 등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는 고용노동 시스템이 종말을 고하면 임금을 통한 부의 분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기본소득, 기여소득을 통한 분배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스티글레르의 말 그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인공지능 자동화로 인한 노동 개념의 변화는 사회 패러다임의 근본적 전환을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그것도 20, 30년 안에.

우리 사회는 과연 그러한 급격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 우리 사회는 어떤 시스템을 통해 그러한 전환을 준비하고 갈등을 해소해 나갈 수 있을까? 이렇게 물었을 때 쉽게 떠오르는 것이 대중교육의 새로운 역할, 혹은 본래적 역할이다. 산업화 시대 대중교육의 주된 역할은 산업구조의 변화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의 공급이라는 직접적인 경제적 효용성에 있었고, 그러한 교육개혁 담론이 위에서 아래로 계몽적인 방식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인공지능 자동화가 급진전되면 대중교육의 경제적 효용성은 직접적인 것에서 간접적인 것으로 바뀌고, 대중교육의 직접적 효용성은 사회적 가치 전환과 형성에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 전환과 형성 담론은 사라져가는 익숙한 관계를 성찰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애도의 성격을 갖기 때문에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성격을 갖게 될 것이다. 계몽은 엘리트주의적이고 강하지만 피상적이고, 애도는 겸손하고 부드럽지만 근원적이다. 교육의 개혁과 혁신을 이야기하는 분들의 자기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계몽이 아니라 애도이다!

<김진경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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