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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룡의 문집 <우봉집>이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앞서 했다. 문집이 있으면 작가 개인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조희룡 문집의 소재처가 늘 궁금했다. 그런데 이상한 인연이 이어졌다.

나수연 후손 집에서 책과 서화를 보고 있는데, 희한한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손바닥만 한 불과 10페이지의 작은 시집이다. 제목은 <일석산방소고(一石山房小稿)>다. 열어보니, 첫 페이지에 ‘철적도인(鐵笛道人)’이란 저자명이 보인다. 철적도인은 ‘조희룡’의 호다.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우봉집>의 저자가 아닌가. 또 글씨를 보니 조희룡이 직접 쓴 것이 분명하다. <우봉집>이 사라졌기에 이제까지 조희룡의 한시를 묶은 시집은 발견된 적이 없다. 흥분을 누르고 <벽오당유고>와 함께 빌려 달라 하니, 선선히 그렇게 하라며 큰 서류 봉투에 넣어 줬다. 가져와 당장 복사를 하고 읽어보니 조희룡이 노년(?)에 쓴 한시다. 시는 모두 고담(枯淡)하고 아취가 있었다.

<벽오당유고>를 박박식씨에게 돌려주려는 날이었다. <벽오당유고>는 큰 책이기에 아무 문제가 없었으나, 분명 복사한 뒤 봉투 안에 넣어두었던 <일석산방소고>가 보이지를 않는다. 야단이 아닐 수 없었다. 후손에게 무어라 변명을 한단 말인가. 남의 귀중한 책을 빌렸는데 없어졌다고 한다면 말이나 되겠는가? 봉투를 쥐고 거꾸로 쏟아보았지만 역시 없다. 한참 정신을 놓고 있다가 혹시 하는 생각에 봉투를 열어 손을 넣었더니, 무언가 잡힌다. <일석산방소고>다. 책이 워낙 얇아 봉투 안에 착 들어붙어 봉투를 뒤집어 쏟아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원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일석산방소고>는 <여항문학총서>에 실어 학계에 공개했다. 이 시집이 학위논문의 한 부분을 차지했음은 물론이다.

조희룡과의 인연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1970~1972년 사이에 낸 <선본해제(善本解題)>란 책이 있다. 이것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서들 중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책에 대해 쓴 해제를 모은 것이다. 요컨대 귀중한 책들이니 특별히 그 내용에 대해 소상히 알려주겠다는 책이다. 나는 평소 공부를 하다가 지겨울 때면 <선본해제>를 읽곤 했다. 책을 직접 접하기는 어렵지만 귀중한 옛 전적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또 옛 전적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한데, 왜 ‘선본’인지, 곧 왜 훌륭한 책인지 납득할 수 없는 해제도 적지 않았다.

어느 날 <선본해제>를 읽다가 <수경재해외적독(壽鏡齋海外赤牘)>이란 책의 해제에 눈길이 갔다. ‘수경재’란 사람이 해외에서 보낸 짧은 편지집이란 뜻이다. 적독(赤牘)은 ‘척독(尺牘)’과 같은 말로 짧은 편지를 말한다.




해제를 읽어보니,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어떤 사람이 귀양을 가서, 자기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책이라고 한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귀양을 가서 자기 친지들에게 보낸 사신이 무슨 중요한 책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선본해제>에는 이런 경우가 종종 있어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우습기는 마찬가지였다.

해설 뒤에 편지의 목록을 실어놓았다. 누구누구에게 보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름을 쓰지 않고 주로 자(字)를 써 놓았다. 자를 자세히 보니 모두 알 만한 사람들이다. 중인들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당시 중인들을 연구하고 있었기에 자만 보고도 쉽게 편지의 수신자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수신자를 확인한 뒤 조사를 더 해보니, 이 편지의 발신인, 곧 편지를 쓴 사람은 다름 아닌 조희룡이었다. 조희룡은 1851년 김정희(金正喜)의 수족과 복심(腹心)으로 임자도로 귀양을 간 적이 있다. 그때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것이 바로 <수경재해외적독>인 것이다. 이 편지집 역시 <여항문학총서>에 영인해 넣었다.

조희룡 글과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어느 날 책을 보다가 머리가 아파 고서목록을 들추어 보았다. 고서목록은 고서를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에서는 으레 내는 것이다. 대학 도서관도 고서가 있으면 따로 고서목록을 낸다. 그런데 그때 내가 즐겨 읽던(?) 고서목록은 규장각과 장서각, 국립중앙도서관, 국사편찬위원회의 고서목록을 복사해 오려서 편집한 목록이다. 불법 복제물로 당연히 저작권법에 저촉되는 책이지만, 연구자로서는 편리하기 짝이 없다. 또 머리가 아프거나 심심할 때 보면 좋은 책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날 <제재진상(諸宰珍賞)>이란 책이 눈에 뜨인다. 여러 재상들의 진귀한 감상품이란 뜻이다. 그런데 거기에 조희룡의 편지가 실려 있다고 밝혀 놓았다. 당시 조희룡의 작품이 모두 번역되고 있었기에 그쪽에 알려 번역되게 했다.

조희룡의 저작은 5권의 <조희룡전집>으로 간행되어 있다. 이미 알려져 있는 <호산외기> <일석산방소고> <수경재해외적독> 외에 <화구암난묵> <우해악암고(又海岳庵稿)>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 <한와헌제화잡존(漢瓦軒題畵雜存)> 등도 있다. <화구암난묵>은 ‘독서신문’에 진작 소개된 적이 있고, <석우망년록>은 임창순 선생이, <우해악암고>와 <한와헌제화잡존>은 정경주 교수가 발굴해 소개한 것이다. 실시학사에서 이 모든 작품들을 모아 번역하고 5권의 <조희룡전집>으로 간행했다. <우봉집>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지금도 소소한 자료는 계속 발견되고 있지만, 어지간한 큰 덩어리는 망라된 셈이다.

작년에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 한영규 교수의 연구실에 갔다가 바깥 표지를 벗긴 <조희룡전집>을 보았다(한 교수는 조희룡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취득한 조희룡 전문가다). 한 교수는 자기에게 한 질이 더 있으니 가져가란다. 고맙기는 하지만 그것을 부산까지 끌고 갈 생각을 하니 아득해진다. 부쳐주면 좋겠다고 했더니, 그러겠단다. 일주일쯤 뒤에 책이 왔다. 책을 훑어보면서 오랜만에 옛날 학위논문을 쓰던 시절을 떠올렸다. 너무 힘들어서 조희룡 쪽은 바라보지도 않았는데, 한 교수 덕분에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고맙소! 한 교수!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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