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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김치 온고지신

opinionX 2017. 10. 19. 11:25

생산지의 무밭과 배추밭, 그리고 향신료며 젓갈 생산과 유통의 일선은 김장 식료 준비로 이미 분주하다. 사전에 따르면 김장은 “겨우내 먹기 위하여 김치를 한꺼번에 많이 담그는 일. 또는 그렇게 담근 김치”이다. 또한 “김장거리로 무, 배추 따위를 심음. 또는 그 배추나 무”를 아우른다. 지상 어느 곳이든 겨울을 지나야 하는 지역에서는 반드시 겨우내 먹을 음식을 따로 준비하게 마련이다. 목축이 성한 곳에서는 양, 사슴, 소, 돼지의 고기, 내장, 선지를 총동원해 겨울 넘기는 동안 먹을 소시지, 햄을 만든다. 어업이 성한 곳에서는 염장이나 훈연으로 생선을 갈무리한다. 물도 마르고, 식물도 동물도 그 모습을 감추는 겨울을 나기 위해, 사람은 내가 사는 데서 주어진 자원으로 음식을 해 어떻게든 새봄까지 간수하고 먹어치워야 했다.

한국인의 김장도 그와 한 동아리다. 이때 김장은 김치라는 특별한 음식과 손을 잡고 있다. 김치는 그냥 염장 채소만도 아니어서, 채소의 소금 절임에다 젓갈 등 동물성 단백질까지 더해 발효를 기다린다. 그러고는 산미가 치고 올라오는 김치 특유의 풍미를 얻는다. 김치는 그저 소금이나 장에 절인 채소, 짭짤하면서도 향미가 강한 국물을 끼얹은 데 그친 음식이 아니다. 짠지나 샐러드하고는 그 속성이 다르다. 김치는 저온에서 숙성돼 어느 한 시점에서 맛의 정점을 찍고, 맛의 정점을 찍은 뒤로도 상당 기간 상하지 않고 버텨주어야 한다.

김치는 홑으로도 자립한 일품요리인가 하면, 흰쌀밥의 으뜸 반찬이고, 국과 찌개와 부침개의 부재료이다. 분식을 대표하는 국수와 만두하고도 김치는 최고의 짝꿍이다. 소든 고명이든 김치의 변신은 자유롭다. 홀로 자립할 수 있으면서도, 밥과 동반해 밥상의 방점이 된다. 다른 음식 안에서는 빛나는 조연이 되는 음식이 바로 김치다. 부재료가 되어 섞일 때에도 제 줏대를 잃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다른 재료와 조화를 이루는 음식이 또한 김치다. 한국인의 김장은 김치로 이룬 음식 문화사상의 일대장관이다.

오늘날과 같은 김치가 태어난 때는 대략 18세기 즈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추가 껴들고 등장한, 짠지나 절임과 확연히 구분되는, 우리 머리에 퍼뜩 떠오르는 바로 그 ‘김치’ 말이다. 19세기에 이르면 김치와 손잡은 김장 기록도 폭발한다.

정학유(丁學遊, 1786~1855)의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는 이렇게 노래했다. “무 배추 캐어 들여 김장을 하오리라/앞 냇물에 정히 씻어 염담을 맞게 하소/고추 마늘 생강 파에 젓국지 장아찌라.” 홍석모(洪錫謨, 1781~1857)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는 이렇게 기록했다. “서울 풍속에 무, 배추, 마늘, 고추, 소금 등으로 장독에 김치(沈菹)를 담근다. 여름의 장담그기(夏醬)와 겨울의 김장(冬菹)은 민가에서 한 해를 보내기 위해 미리 준비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여기서도 김치와 김장이 확실히 손을 잡고 있다. 김치를 “침저”라 하고, 김장을 “동저”라 했다. 맥락으로 보아 오늘날의 김장김치이다. 이 앞 문단에는 “저채만두(菹菜饅頭)” 곧 “김치만두”까지 언급하고, 김치만두를 가장 괜찮은 시절음식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1890년대에 집필된 것으로 보이는 <시의전서(是議全書)>에는 통배추김치가 확립돼 있다. 오늘날의 배추김치와도 흡사하다. 통배추와 동물 단백질과 젓갈과 고추 및 마늘 양념이 보다 세련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좋은 통배추를 절이고 고추, 총백, 마늘, 생강, 생률, 배를 채치고 조기는 저며 놓고 청각, 미나리, 파, 소라, 낙지를 채에 섞어서 담고 삼일 만에 조기젓국을 달여 물에 타 국물을” 부어 담근 김치이다.

이 흐름은 20세기를 거쳐 오늘에 이어졌다. 한국 음식 문화사 연구의 선구자 방신영 선생은 ‘여성(女性)’(1939년 11월호)에 “김장교과서”를 소제호로 해 김장김치 담그는 방법을 소개하기도 했다. 배추김치, 젓국지, 섞박지, 짠지, 동치미, 깍두기, 채김치, 보쌈김치에 이르는, 이름만 봐도 침이 고이는 김치 잔치이다. 아삭아삭 씹는 데서 후룩 마시는 데 이르는 김치, 그리고 일품요리에 접근하는 별미 김치까지, 참 면면히도 이어졌다.

이어졌다고 감탄하는데, 지난 음식 문헌이 내게 말을 건다. 지난 김치의 역사에 이어, 너는 당대에 어떤 김치를 이루고, 먹고, 감각할래? 응답하고 싶다. 이어진 것은 이어진 것대로 고맙게 받고, 그 안에서 당대가 반짝반짝하는 갱신을 이루어, 다음 세대에 유산이 될 만한 김치를 이루고 싶다. 눈으로는 김치 기록을 찾고, 발걸음은 생산지로 향한다. 아, 침이 고인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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