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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내가 유년기를 보낼 때 당시 부모들은 친구와 다툰 후 울며 귀가한 아이를 안아 달래며 이렇게 말했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친구끼리 놀다가 서로 다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그 경험을 어떻게 처리하고 넘어가야 하는가에 중점을 두었던 듯하다. 그들은 아이를 안아 달래면서 이런 지혜를 물려주었다. “참는 사람이 장사다.”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도 아이는 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싸움에서 지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는 인식을 가질 수 있었다. 부모가 안아서 다독여주었던 경험을 내면화시켜 마음속에 스스로를 달랠 수 있는 기능을 간직할 수 있었다.

내가 청춘기 무렵이 되었을 때 당시 젊은 엄마들은 친구와 다툰 후 울며 귀가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왜 만날 맞고 다니느냐? 다음부터는 맞은 만큼 너도 때려줘라.” 물론 아이를 안아서 달래주지도 않았다. 부모의 말은 자녀에게 절대적 진리이다. 아이들의 싸움은 복수전처럼 변해가고, 간혹 어른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부모 역시 몰랐을 것이다. 그 행위가 실은 자신이 소화시키지 못하는 감정을 아이들에게 집어던지는 일이라는 것을. 왜 맞고 다니느냐고 소리칠 때는 자기 안의 분노를 아이에게 떠넘겼고, 왜 공부를 하지 않느냐고 잔소리할 때는 내면의 불안을 아이에게 물려주었다. 부모에게서 마음을 달래는 경험을 제공받지 못한 아이는 부모가 했던 것처럼 모든 불편한 감정을 바깥으로 쏟아내는 방법밖에 배우지 못했다.

우리 사회에 불안과 분노가 팽배하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우리 사회를 불안사회, 분노사회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라는 유기체가 불안, 분노한다기보다는 그런 감정들을 더 자주, 많이 표현하는 개인들이 있을 뿐이 아닌가 싶다. 그런 개인들이 자기 문제를 외부로 투사하면서, 온 세상이 불안하니까 나도 그렇다는 식의 일반화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듯하다. 그런 감정들은 미디어의 발달과 함께 급속히 널리 확산되는 특성이 있다.

우리에게 처음 인터넷 통신이 생겼을 때 그곳은 사람들의 내면을 고스란히 비춰주는 공간처럼 보였다. 그곳에 들어가면 동호회라는 공간이 있어 회원들끼리 내밀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곳에 실린 글들은 누군가 자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지지해주었으면 하고 호소하는 내용들이었다. 통신 문화가 발달할수록 그 안의 공간은 점점 세분화되었고, 그곳에 올라오는 글들은 더욱 내밀한 내용, 더 짙은 감정들을 담고 있었다. 최근에는 개인마다 하나씩 공간을 확보하고는 그곳에 내면 풍경뿐 아니라 일상적 삶 전체를 생중계하는 듯 보인다.

사실 소셜미디어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그것일 것이다. 개인들이 혼자서 소화시키지 못하는 감정들을 그곳에 토로하는 자기표현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그곳에서 어떤 이들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자기 모습만을 표현하면서 미화된 자기 이미지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 어떤 이는 내면의 고통스러운 부분,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감정들을 표현한다. 그들은 자기가 연출하는 바로 그 모습 그대로 타인들이 자신을 인정해주기를 부탁하는 것 같아 보인다.

실제로 그곳에서는 인정과 지지, 사랑과 배려 등이 교환되기도 한다. 또한 그 공간은 연약한 개인인 ‘나’라는 존재가 익명의 군중 속에서 ‘우리’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보호받는 듯한 편안함을 느낄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곳은 현실에서 잘 소통하지 못하는 이들의 소통 장소가 되기도 한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그저 말하는 것만으로도 절로 타인과의 관계가 형성되는 듯 보이는 신기한 장소처럼 여겨진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옛 부모들 “지는 게 이기는 것”이라며 자녀 마음 다독였는데
불안·분노를 외부로만 표출하는 오늘 우리의 내면은 살풍경


하지만 진정한 자기만의 정체성이나 창의성을 확보하려면 그 공간을 개인의 내면으로 옮겨와야 한다. 누구에게나 개방된 열린 공간에다가 자기를 표현하는 대신 내밀한 심리적 공간 속에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한다. 그와 같은 심리적 공간을 카를 융은 테메노스라고 불렀다. 테메노스는 고대 희생 제의가 치러지던 공간을 말하는데, 융은 그 용어를 개인이 내면에 만들어 가지는 심리적 공간을 지칭하는 용어로 차용해왔다. 내면에 심리적 공간, 의식의 공간이 있어야 부정적인 감정을 담아두고 소화시킬 수 있다. 갈등을 폭발시키지 않고 해결책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릴 수 있고, 그곳에 고요히 머물며 피로해진 정신을 회복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한 개인이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는 창의성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그 공간이다.

테메노스의 핵심은 밀봉에 있다고 한다. 중세 연금술사들은 헤르메스의 그릇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납, 아연, 구리들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그 속에 넣고 잘 밀봉해두면 그것이 금으로 변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연금술의 핵심이 그릇의 밀봉 상태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우리나라 발효식품 문화에서도 밀봉이 관건이다. 밥과 누룩이 변해 술이 될 때까지 열어보지 못하도록 한다. 밥을 지을 때조차 중간에 열어보면 뜸이 잘 들지 않는다. 마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경험과 감정, 체험과 정서를 얼마나 내면에 간직해둘 수 있느냐에 따라 그 역량과 풍요로움이 달라진다. 내면에 간직된 경험만이 황금으로 변할 수 있다. 경험과 기억이 섞일 때 통찰이 생기고, 감각과 상상력이 결합되어 창의성이 발현된다. 몇 가지 경험에서 추출된 공통 원칙은 삶을 이끄는 지혜로 쌓인다. 이 모든 유익함은 밀봉된 내면에서만 이루어지는 화학 작용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셜미디어는 절반만 유익하다.

우리가 경험에서 배우지 못하고, 고통을 통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면에 테메노스가 없기 때문이다. 의식의 공간에 경험을 간직하지 못한 채 바로바로 외부로 표출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아직은 즉각적인 자기표현이 필요한, 치유해야 할 마음의 문제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지는 사람은 패배자이며, 참는 사람은 바보 취급 당하는 듯 보인다. 고통을 통해 성장하는 게 아니라 작은 고통 앞에서도 쉽게 무너진다. 개인도 사회도 무너지려는 마음을 다독여 일으켜 세울 때, 먼저 그 경험을 내면에 간직하고 인내하면서 되새길 수 있는 의식의 공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내면 공간에 머물 때에만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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