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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남자에게 “애인에게 준 가장 비싼 선물은?” 하고 질문한 적이 있다. 그는 게임기라고 답했다. 여러 달 용돈을 아껴 선물했다고 덧붙였다.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 선물을 준 후 얼마만에 헤어졌어요?” 당황하는 기색으로 그는 기간을 계산했다. 약 열 달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내 예상은 6개월이었는데, 예상보다 길었다. 그 연애가 곧 끝났을 거라 예상한 이유는 그들이 좌충우돌하는 열정을 지닌 젊은이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자가 원했든 아니든 자신의 능력에 벅찬 선물을 줌으로써 상대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남자의 마음속에는 이미 불안과 비하감이 존재한다. 만약 여자 쪽에서 먼저 비싼 선물을 요구했다면 그녀는 관계를 물질로 치환하는 오류를 범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 관계는 허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 셈이다.

간혹 명품 가방이나 비싼 선물을 원하는 여자친구 때문에 곤란해하는 젊은 남자를 보면 연인과 헤어지는 방법을 권한다. 남자에게 비싼 물건을 요구하는 여자는 지나치게 의존적인 사람이다. 비싼 물건이 자신의 가치를 돋보이게 한다고 느낄 정도로 자기존중감이 약하며, 마음 깊은 곳에는 자기가 명품처럼 특별하다는 나르시시즘마저 뒤섞여 있다. 비싼 옷과 구두로 치장한 다른 여자들을 보면서 시기하는 마음까지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위에 나열한 감정은 여자들에게 보편적인 것이다.

가끔 여자들의 결핍감은 그 바닥이 얼마나 깊고 어두울까 생각해본다. 믿어지지 않지만 한탄하듯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여자들은 약속한 듯 동일한 수사법을 사용한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엄마가 혹은 아빠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고, 남자친구가 혹은 남편이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고 하소연한다.

여자는 결핍을 널리 공표함으로써 사랑받으려 하고, 심지어 그 결핍을 소중히 간직한다고 일찍이 프로이트는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여자의 결핍감 근원에 페니스 엔비(남근 선망)가 있다고 설명한다. 여자가 핸드백이나 구두를 목숨처럼 아끼는 것은 그것이 결핍된 것을 대체해주는 사물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 이론이 아니라도 우리나라처럼 남녀 차별이 심한 문화에서 자란 여자의 내면에는 결핍감이 쌓일 수밖에 없다. 여자들은 남자 형제와 차별당한 내용을 칫솔 하나, 옷 한 벌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기억한다. 성인이 된 후 상대적으로 여성의 사회 진출 기회가 적은 우리 문화는 다시 한 번 여성에게 박탈감을 안긴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근원적이고 치명적인 결핍의 감각은 탄생하는 순간 만들어진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출생의 순간 환영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경험한다. 딸이라는 이유 때문에 윗목에 밀쳐지거나 어른들이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 돌린 기억을 무의식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다. 그 경험은 당사자의 첫 번째 정서가 될 뿐 아니라 세계관의 밑그림이 된다. 환영받지도 사랑받지도 못한 최초의 박탈감은 무의식 깊은 곳에 새겨져 영원히 당사자를 결핍과 불안에 떨게 만든다.

우리나라 텔레비전에는 왜 그토록 먹는 장면이 자주 방영되는지 묻는 이들이 있다. 언제 보아도 텔레비전에서는 입을 크게 벌리고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이 흔하게 목격된다. 사람들은 입 안 그득한 음식을 씹으며 가난해 굶주리던 시절을 이야기한다. 물로 배를 채우거나 보리쌀 한 줌에 봄나물을 듬뿍 넣어 온 가족 끼니를 해결했던 이야기. 착한 가격에 푸짐한 음식을 주는 식당을 찬양하기도 한다. ‘먹방’이라는 신조어는 우리의 결핍감이 또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의미처럼 들린다. 먹방을 의식한다는 것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또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리고 있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너무 오래 박탈과 결핍의 자리에 서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그만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역사적 박탈감과 개인적 결핍감을 해결하는 방법은
박탈과 결핍감을 보상받으려는 마음을 포기하는것


우리의 현대사는 그 자체가 박탈과 결핍의 과정이었다. 지난 100년 동안 우리나라 국민은 누구나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조국과 삶의 터전을 잃고, 가족과 재산을 잃은 경험을 지나왔다. 삶을 통째로 잃은 이도, 목숨을 잃은 이도 있다. 가난했던 시절 역시 불과 얼마 전의 일이며, 마음은 여전히 그 상실의 경험에 머물러 있는 듯 보인다. 여성들이 자신의 결핍감을 소중히 간직한 채 포기하지 않으려 하듯, 우리 사회도 못 받은 사과와 덜 먹은 끼니들에 대해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우리는 결핍의 빈 곳을 소중히 간직한 채 박탈의 허공을 디디고 서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아무리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져도 소용없는 일이다. 자본주의는 다시 개인의 결핍감을 자극하며 성장하고 있으므로.

여자들의 결핍감은 그 자체로 아무 잘못이 없다. 심지어 그녀들은 자신의 무의식 속 검은 구멍을 인식하지도 못한다. 모르는 채로 그것을 타인에게 떠넘긴다. 남자친구에게서 게임기를 선물받고 떠난 여자처럼 자기도 모르게 남자에게 박탈감을 넘겨준다. 남자는 이제 결핍 상태를 인식하게 되며, 상실된 것을 보상받기 위해 열정적으로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게 된다. 다른 여자거나 중독 물질 같은 것을. 그러면서 가끔 중얼거릴 것이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우리는 수직으로 수평으로 널리 박탈감, 결핍감을 퍼뜨리는 듯 보인다.

역사적 박탈감도, 개인적 결핍감도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못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기어이 받아내는 일이 아니다. 박탈과 결핍감을 보상받으려는 마음을 포기하는 일이다. 그것을 영영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솟구치는 분하고 억울한 마음도 내려놓아야 한다. 그런 다음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가 이루어낸 것들에 초점을 맞추어 볼 수 있다.

관점을 바꾸면 우리의 성취감, 승리감, 강인함 등이 보일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정신에 자연의 신비로움과도 같은 복원력이 있으며, 우리가 경험한 상실이 우리를 더욱 강하고 창조적으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박탈의 역사가 아니라 승리의 역사를 새롭게 써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피해자의 승리가 가해자의 잘못을 없애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해자의 죄는 영원히 그들 몫이라는 자명한 사실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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