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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가 저물어간다. 10년 단위로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것은 다소 편의적이다. 역사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10년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막 지나가고 있는 2010년대라는 ‘디케이드(decade)’에 대한 기억과 성찰은 사회변동을 분석하고 전망하는 사회학자들에겐 의미 있는 일이다.

지구적 차원에서 2010년대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대침체’가 진행돼온 시기였다. 대침체 시기의 사회변동은 2017년 ‘거대한 후퇴’로 명명됐다. 거대한 후퇴란 세계 질서가 전진하던 걸음을 멈추고 뒤로 물러서는 형국을 지칭한다. 거대한 후퇴를 가져온 원인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이중적 위기였다.

먼저 위기의 신자유주의는 불평등 강화와 사회통합 약화로 나타났다. 감세·규제완화·유연화를 추구했던 신자유주의는 금융위기 이후 격차와 불평등을 더욱 증대시킴으로써 연대와 통합을 훼손시켰다. 한편 동요하는 세계화는 민주주의 퇴조와 시민문화 고갈로 이어졌다. 지구적 상호의존성이 증가하는 과정 속에 민주주의의 일국적 조정 메커니즘이 허약해지고, 이 정치사회의 딜레마는 시민사회에 가감 없이 전이됨으로써 통합과 연대의 문화적 자원을 다시 한 번 소진시켜 왔다.

1990년대 후반 철학자 리처드 로티가 내놓은 21세기의 예측, 다시 말해 사회적 불평등이 확산되고, 저급한 선동 정치가가 등장하며, 병적인 가학성 세계로 회귀하여 여성과 소수자를 증오하는 경향이 만연할 것이라는 예견만큼 지난 10년의 그늘을 날카롭게 전망한 것은 없었다.

거대한 후퇴의 10년은 새로운 혁신의 10년이기도 했다. 경제학자 앤드루 맥아피와 에릭 브린욜프슨은 2010년대를 ‘제2의 기계 시대’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들은 전략가 톰 굿윈의 관찰을 인용하여 ‘3중 혁명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굿윈에 따르면, “세계 최대의 택시 회사인 우버는 소유하고 있는 자동차가 한 대도 없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미디어 기업인 페이스북은 콘텐츠를 생산하지 않는다. (…) 세계 최대의 숙박업체인 에어비앤비는 부동산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3중 혁명이란 기계·플랫폼·크라우드(군중)가 이끄는 혁명이다. 인공지능으로 상징되는 기계 능력의 혁신, 우버로 대표되는 플랫폼 기업의 부상, 정보사회의 진전에 따른 집단지성으로서의 크라우드의 등장은 경제와 산업과 기업의 ‘혼동 속 성장’을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노동은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증가하고, 그 결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은 구체적인 두려움으로 진화해 왔다.

이러한 경제 변동에 상응한 정치 변동이 포퓰리즘의 확산이었다. 포퓰리즘은 기성 대의정치의 한계에서 태어나고 서식했다. 계급과 이념의 전통적 정치 균열을 대신하여 포퓰리즘은 ‘엘리트 대 국민’의 새로운 정치 균열을 앞세웠다. 포퓰리스트에게 엘리트란 기득권의 다른 이름이고, 정치의 궁극적 목표는 엘리트 기득권에 맞선 국민 주권의 회복에 있었다. 미국 ‘트럼프 현상’에서 이탈리아 ‘오성운동 돌풍’까지 포퓰리즘은 정치적 다원주의를 부정함으로써 결국 근대적 대의민주주의를 위협해 왔다.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포퓰리즘의 강화는 공론장에서 ‘탈진실(post-truth) 시대’를 열었다. 탈진실이란 진실을 요구하는 목소리보다 진실처럼 느껴지는 발언이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을 함의한다. 진실을 이루는 사실보다 믿고 싶어 하는 사실이 더 중요해지고, 이런 인지적 편향은 영국 브렉시트 사례처럼 가짜 뉴스들을 범람하게 했다.

이 탈진실의 시대에 이성과 합리성의 계몽주의는 다시 한 번 위기에 처했다. 정서와 신념이 진리와 도덕의 자리를 대신하고, 중간적 완충 지대가 사라짐으로써 정치적·문화적 양극화가 심화됐다. 지난 10년의 사회적 풍경은 합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회였다기보다는 집합적 감정과 탈진실에 사로잡힌, 사회학자 미셸 마페졸리가 개념화한 ‘부족주의 사회’의 성격이 두드러졌던 것으로 보였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내가 2010년대를 너무 비관적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볼지도 모르겠다. 그 비관의 근원은 기성 제도의 예측 불가능성 및 통제 불가능성이 안겨주는 현재의 불안과 미래의 두려움에 있다. 이제 10여일이 지나면 2020년대가 열린다. 2020년대에 비관의 시대가 계속 이어질지, 새로운 낙관의 시대를 일궈갈 수 있을지를 예측하긴 어렵다. 나는 구조적 강제에 맞서는 우리의 성찰 능력과 집합의지를 여전히 신뢰한다. 올바른 성찰과 새로운 의지를 위해 지난 10년에 대한 한 사회학자의 기억을 여기에 적어두는 까닭이다. 굿바이, 2010년대!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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