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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입학한 것은 1979년 봄이었다. 유신체제가 종막을 향해 가던 시절이었다. 사회학과가 지금은 사회과학대학에 있지만 그때는 문과대학에 속해 있었다. 당시 널리 알려진 문과대학 교수는 세 사람이었다. 국문학과 박두진 교수, 사학과 김동길 교수, 철학과 김형석 교수였다. 세 교수 가운데 내 시선을 가장 사로잡은 이는 김형석이었다. 그는 고교 시절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인 <고독이라는 병>과 <영원과 사랑의 대화>의 저자였기 때문이다.

누구나 대개 그러하듯, 대학에 입학해 사회과학을 배우기 전에는 제도와 구조보단 개인과 실존을 중시한다. 유신독재의 그늘이 짙었던 1970년대 중·후반, 그 그늘을 만들었던 권위주의 정치체제의 등장과 작동 방식에 대한 사회과학 지식이 부족했던 10대 후반인 내게 고독, 사랑, 영원과 같은 어휘들은 우울한 시대적 분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개인적 위안을 안겨줬다. 그땐 몰랐지만 구조적 강압이 클수록 자아는 추상의 개념들로 쌓아올린 실존적 성채 안에 홀로 거주하려는 성향을 보이는 법이다.

그런데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역사의 격류에 휩쓸렸다. 1학년 가을 유신체제가 종말을 고했고, 2학년 봄 광주항쟁이 일어났다. 나는 사회과학 공부에 열중했고, 고독, 사랑, 영원이 아닌 민중, 투쟁, 해방에 익숙해졌다. 우리 사회는 산업화 시대를 막 지나 민주화 시대로 나가고 있었다.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당시 내 손에 잡힌 건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이었다. 김형석이란 이름은 내 시야에서 그렇게 멀어졌다.

이랬던 김형석 교수를 다시 발견하게 된 것은 최근이었다. 우리 사회 고령화 현상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그가 펴낸 <백년을 살아보니>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행복 예습&gt; 등을 읽게 됐다. 대학에 입학해 처음 봤을 때 그는 환갑 직전이었는데, 어느새 100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10대 후반이었던 나 역시 환갑에 다가서는 나이가 된 셈이다.

개인적 기억이 길어졌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김형석의 ‘100세 철학’이다. 1960년대와 70년대의 김형석이 대중에게 고독과 영원의 사상가였다면, 이제 그는 지혜와 행복의 사상가로 다가서고 있다. 그는 말한다. 이 세상에서 누구도 나이 듦을 피할 순 없다. 언젠가 찾아오게 돼 있다. 늙는다는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늙어가야 할까. 김형석은 말을 잇는다. 젊었을 땐 용기가 필요하다면, 늙었을 땐 지혜가 요구된다. 지혜의 핵심은 자기의 삶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다. 우리 인간은 늙어서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고, 다음 세대에게 존경받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이 권리와 의무를 다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계속 공부하고, 취미 생활을 하며, 봉사 활동을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그는 들려준다.

김형석의 주장이 크게 새로울 건 없다. 그의 책들은 철학적 담론이라기보다 대중적 에세이다. 돌아보면 그는 처음부터 시민을 위한 사상가였지 전문가를 위한 철학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중적 에세이라고 해서 사유의 무게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정보사회의 진전과 네트워크사회의 만개로 우리 인류는 본격적인 대중사회를 이제야 맞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사회문제라 하더라도 제도적 처방과 개인적 대응이 동시에 중요하다. 100세 시대를 맞이해 제도는 노후복지를 강화하고 고용 및 교육 프로그램을 추진해야 한다. 50%에 육박하는 노인빈곤율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노인자살률을 지켜보면, 노후 정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정치사회는 노후 대책과 노후복지의 제도적 처방에 대한 역사적 타협을 서둘러야 한다.

더불어, 늙어감에 대해 개인적 차원에서 준비해야 한다. 60세를 전후로 은퇴한 후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보낼지를 50세에 다가서면서부터 고민해봐야 한다. 가난하고 외롭고 병든 나날로 이어지는 삶이라면, 100세 시대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남은 50년을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에 대한 자기만의 생각과 방법을 포함한 ‘후반기 인생’의 여행 지도를 마련하는 실존적 과제는 개인적 대응의 몫인 셈이다.

김형석의 정치적 견해까지 동의하진 않는다. 그러나 정치적 판단은 그의 사유의 일부일 따름이다. 경험만큼 더 강력한 설득의 언어는 없다. 공부와 취미와 봉사의 노후 생활은 절로 획득되는 게 아니다. 습관과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고 요구된다. 오십에 다가서는 이들에게 감히 권하는 바이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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