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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설 연휴 때 오랜만에 가족여행에 나섰다. 여행지를 두고 고민하던 끝에 2007년 방문한 적이 있는 전주로 정했다. 전주를 거쳐 변산반도의 채석강과 내소사를 코스로 잡았다. 전주를 여행지로 잡은 것은 태어난 지 백일 된 둘째를 데리고 간 탓에 고달프긴 했지만 두고두고 많은 얘깃거리와 추억을 안겨준 곳을 잊지 못해서였다. 고즈넉한 한옥마을의 풍경과 격에 맞는 적절한 볼거리,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맛이 더해져 “어게인 전주”를 외치며 떠났다. 여행을 가면서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큰애는 “친구들이 요즘 당일치기로 놀러갔다 오는 곳”이라고 알려줬다. ‘10대들이 삼삼오오 한옥마을에 간다고. 애들이? 수준 있네….’ 솔직히 이해가 잘 안돼 흘리고 말았다.

그런데 웬걸 전주 한옥마을에 들어서자 아이의 말이 실감났다. 강남 가로수길에 와있는 것인지, 명동 한복판에 서있는 것인지 도무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한옥마을 거리마다 문어구이와 소문난 닭꼬치, 초코파이, 아이스크림, 커피 가게가 즐비하게 들어서 있고 주전부리하려는 방문객들이 긴 행렬을 이뤘다. 느긋하게 걷기는커녕 사람에 치여 떠밀리듯 앞으로 걸어나가야 했다.

한옥은 너나할 것 없이 한옥체험 간판을 내걸고 편리한 숙박시설을 자랑했다. 우리가 예약한 한옥은 ㄷ자도 아닌 거의 ㅁ자형에 8칸짜리 방을 빼곡히 둘렀다. 한옥 처마 밑에는 8대의 에어컨 환풍기가 집을 지켜주는 옛 성주신마냥 앉아있었다. 방에는 TV와 작은 냉장고가 갖춰져 있었다. 방을 늘려 개조한 탓에 툇마루와 마당이 사라졌다. 이곳뿐 아니라 겉모양만 한옥인 곳이 꽤 많았다.

다음날 조식은 셀프코너에서 원두커피와 토스트를 먹었다. 8년 전에는 어땠나. 밤새 절절 끓는 방에 누워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눈을 비비며 대마루를 지나 건넌방에 마련된 놋그릇 밥상에서 정갈한 아침을 맛보았다. 툇마루에 앉아 눈발이 날리는 넓은 마당과 그 위 하늘도 올려다봤다. 굳이 소문난 맛집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허름한 간판의 밥집에 들어가도 간장게장 밑반찬과 들깨탕에 딱 벌어지는 한 상이 차려졌고 가격대도 비싸지 않았다. 한적한 공방과 작은 박물관을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런데 막상 그리워했던 곳에 와보니 모든 기억들이 토스트 부스러기처럼 흩어져버렸다.

속상한 마음에 한옥마을 가장자리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가 주인장을 붙들고 물어봤다. “왜 이렇게 바뀐 거죠?” 한옥마을 소식을 편의점에 묻다니 좀 아이러니했지만 주인장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이제 그런 식당은 다 없어졌어요. 음식 값 올리고 빨리 회전시켜도 비싼 임대료를 감당 못하잖아요. 한옥에 살던 원주민들도 많이 떠났어요. 카페다 뭐다 신식 음식점이 죄다 들어섰죠. 옛날 분위기 찾으면 안돼요, 이젠.”

전북 전주시 한옥마을을 찾은 내외국인들이 한옥마을 일대를 구경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실망한 남편과 나는 ‘전엔 어땠는데…’ 하면서 계속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두 아이는 한옥마을 거리를 누비며 군것질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신났다. 어떤 이들은 한옥마을이 활기를 찾았다고 평가한다. 부쩍대는 방문객들과 상권을 보면 맞는 말일 것이다. 요즘 세대에 맞게 변모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5년 전 100만명 방문객에서 지난해는 600만명이 넘어섰다고 할 정도니 옛 분위기를 찾는 게 무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곳을 도망치듯 빠져나오면서 아이가 한 말이 이번엔 귀에 쏙 들어왔다. “어차피 그 유명하다는 아이스크림이랑 초코파이 서울에서도 파니까 먹을 수 있어. 여기 안 와도 돼….” 철없다 싶었지만, 어느 면에선 맞는 말이기도 했다. 소비자로서의 감상인 셈이다. 복잡한 곳에서 떠나와 시간을 거슬러 옛 사람들과 교감하며 소박한 즐거움을 맛본 게 아니라 그저 소비하고 돌아가는 길 같았으니까. 여행은 저마다의 취향이지만 여행지 그 이상을 바랐던 터라 안타까웠다.


김희연 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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