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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외신에 수단에서 최신 기술의 활용이 농업 생산에 큰 진보를 가져오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수로(水路)를 관리하고 가축의 건강을 점검하는 데에도 최신 기술이 활용되는 데, 특이한 것은 소들을 냉방이 된 우리에서 기른다는 것이다. 소들을 위해서나 환경을 위해서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것은 과학 기술로 하여 일어나고 있는 전 지구적인 변화의 한 증표가 된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기이한 연결이기는 하지만, 만델라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반응이 전 세계적인 것도 세계화의 한 표현이 아닌가 한다. 과학 기술에 못지않게, 한 곳에서의 정치적 성공은 다른 곳에서도 곧 학습과 모방의 대상이 된다. 다만 그것은 보편적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경우에 그렇다. 이미 많이 나온 논평에 하나를 더하는 불필요한 일이 되겠지만, 만델라가 온 세계에 보편적 울림을 갖는 정치지도자가 된 사정을 잠깐 생각해보기로 한다.


말할 것도 없이 만델라는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이, 극한적인 조건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승리를 가져 온 것은 물리적인 힘보다는 정치적 이상의 힘이었다. (물론 그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에 깊이 관계되는 이상이었다.)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이 혹독한 남아프리카의 백인 우월주의 통치는 무력 저항을 낳고 급기야는 온 나라를 내란 직전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만델라는 이 위태로운 상황을 역전시켜 평화적 해결로 이끌어 갔다.


정치 투쟁은 종종 폭력과 증오의 힘을 동원한다. 그리하여 악마와 손잡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이룰 수 없는 것이 정치라는 생각이 있다. 어쨌든 정치 투쟁은 그 나름의 열광을 낳는다. 그리고 모든 힘이 그러하듯이 정치적 열광 그리고 폭력은 장기 집권을 원한다. 그래도 사람의 마음에는 스티븐 핑커의 용어를 빌려 “우리 본성의 보다 착한 천사”가 숨어 있어 평화를 소망한다. 그러나 이 자연스러운 소망은 너무 쉽게 드러나면 약자의 약점이 된다. 이 약할 수 있는 소망 또는 꿈을 뒷받침하는 것이 강인한 윤리적 의지이다. 이 윤리의 힘은 정치의 폭력에 맞서서 정치를 평화로 전환할 수 있는 힘이 된다. 만델라의 삶이 갖는 호소력은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면서도 강인한 투지로써 이 천사의 은밀한 꿈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모범을 보여준 데 있다.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입원해 있는 프리토리아의 병원 앞(출처 :경향DB)


그의 서거 후 다시 보도된 한 인터뷰에서 기자가 만델라의 높은 업적에 관하여 질문했다. 그것에 답하여 만델라는 큰 정치적 업적은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으며, 집단적 노력만이 그것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남아프리카의 민주화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의 희생적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자신의 업적으로 돌린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주의가 그에게 집중되기 때문에 그 스스로도 노력을 더 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발언은 만델라의 겸손한 자세를 나타낸 것이지만,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도 단순한 수사라고 할 수는 없다. (그의 발언은 대체로 수사적이라기보다는 정확하다는 인상을 준다.) 힘을 함께한 사람에는 아프리카국민연합(ANC)을 비롯하여 흑인의 인권과 남아프리카의 민주화를 위하여 노력한 그의 동료와 동지들이 있다. 그러나 그 외에도 그의 투쟁에는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참여하였다. 거기에는 많은 남아프리카 작가들도 포함된다. 1991년에 노벨상을 받은 나딘 고디머는 반인종주의 투쟁에 동조하는 작품을 썼고 만델라가 종신 징역을 선고받은 재판에 나오기도 하였다. 2003년 노벨상 수상자인 J, M. 쿳시도 정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반인종분리주의와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만델라의 정치 투쟁은 보다 먼 곳에서도 지지를 얻었다. 2007년에 영국 의사당 앞 광장에 만델라 동상이 세워진 것은 그의 투쟁이 일으킨 공명(共鳴)의 외연(外延)을 그려낸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에 못지않게 그가 지키고자 한 것은, 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 평화적 정치 수단의 유지였다. 무장 투쟁을 지휘한 일도 있으나 그는 무고한 사람이 다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보다 큰 원칙은 역시 평화적인 수단의 정치 투쟁이었다. 만델라는 종종 간디에 비교되지만, 간디의 ‘아힘사’의 규칙은 그에게도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에 취임한 후 만델라의 정책 목표의 하나는 화해였다. 이 목표를 위하여 설립한 것이 진실화해위원회이다. 그것은 인종분리주의 정치 하에서 일어났던 여러 사건의 당사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저질렀던 잘못을 고백하게 하고 그에 대하여 사면을 주자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비판--어떤 필자가 나열하는 바로는 “추방, 공포, 고문, 유기, 신체절단, 살인” 등을 묵살하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불가능하게 하는 일이 이 위원회가 하는 일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화해의 정책이 정권의 평화적 이행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틀림이 없다.


화해를 원리로 하는 정치 행동 가운데에도 놀라운 것은 백인 정부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데클레르크와의 상호협력이다. 민주선거를 통한 정권 이행은 그의 협조를 얻어 순탄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데클레르크는 인종주의적 정책에 동조한 일도 있지만, 그의 당에서도 ‘계몽파’에 속하여 민주주의 원칙을 받아들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그는 곧 인종분리주의 폐기, 만델라 석방, 민주 선거 등 인종주의를 청산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만델라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에 그는 부통령 직책을 수행하였다. 그가 만델라와 나란히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어떤 논평은 만델라의 화해 정책이 그의 “능란한 정치 수완”을 보여준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정략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윤리적 신념에서 나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의 윤리적 행동의 원칙은 정치만이 아니라 보다 신변적인 일들과 언어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그가 감옥에 있을 때의 간수들을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하고 점심을 같이 하기도 했다. 그는 “그들의 기본적인 인간됨”을 인정하였다. 그에게 사형을 구형했던 검사를 초대하여 점심을 같이 한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그와 함께 민주주의 이행을 협상한 데클레르크는 그가 전혀 원한을 품고 있지 않은 것을 보고 놀랐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모든 것이 정략적 계산의 표현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를 움직인 것은 모든 인간의 정신적 존엄성에 대한 깊은 신뢰였다.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의 소에토 지역에 그려진 넬슨 만델라의 초상(출처 :경향DB)


만델라가 세계를 감동시킨 지도자라고 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진실과 화해 정책이 정의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는 것은 앞에 말한 대로이다. 만델라를 계승한 정부는 계속 부패와 불법으로 오염된 정부라는 비판을 받았다. 남아프리카는 세계적으로 빈부의 격차가 큰 나라이다. 백인이 독차지하고 있던 토지 가운데 30%를 흑인 소유로 옮기게 하겠다는 만델라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아직 흑인 소유의 토지는 3%에 불과하다고 한다.


필자는 2000년 8월에 남아프리카를 방문한 일이 있다. 짧은 기간에 돌아본 것이지만, 그렇게 수려한 산하와 정비된 도시가 세계 다른 곳에는 별로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케이프타운 근교에 쌓여 있는 컨테이너들이 흑인들의 집이라는 것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잘 정비된 길거리임에도 도시에 걸어 다니는 것이 위험하다는 경고를 늘 들었다. 택시 운전사는 총기를 차에 싣고 다녔다. (1999년에 출간된 쿳시의 소설 <치욕>은 반드시 정치가 주제가 되는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이야기의 배경이 민주화 이후의 무법 사회인 것은 틀림이 없다. 한 평자는 이 소설이 남아프리카를 ‘강간의 나라’로 그리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여러가지 보고를 종합하면, 지금도 상황이 크게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백인이 독점하던 부유층에 진출한 흑인들이 적지 않으나, 사회구조는 별로 바뀐 것이 없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이다. 필자의 방문 이후 13년의 세월이 흘렸지만, 거리의 사정도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는다. 큰 발전이 없는 데 대하여 만델라의 책임도 없지 않다는 소리도 높아진다. 그러나 한 사람의 지도자가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바른 정치 원칙과 윤리적 원리로 행동하는 정치 지도자를 갖는 것, 그것이 나라의 기초가 바르게 놓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와 사회의 전체적인 발전은 그것을 계승하는 다양한 작업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최근에 데클레르크는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나 남아프리카에 기본적인 안정을 가져 온 것이 만델라 전 대통령이라고 말한 바 있다.


모든 것이 잘될 수는 없다. 사람의 일에는 그것이 보이지는 않더라도, 드높은 이상의 부름에 따라 계속되는 쉼 없는 노력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정치가 쉼 없이 부풀리고 있는 싸움들이 그러한 노력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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