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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월, 출판사 일로 중국에 출장을 가 있을 때였다. 마을 어르신 한 분이 전화를 하셨다. 이장님이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공석인 이장직을 맡아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어르신, 이장이 뭘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제가 어떻게 이장을 맡아요?”

“한 달에 한 번 이장협의회에 가서 잘 듣고, 마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해주기만 하면 되는데 뭘 그래요.”

이장협의회에만 잘 나가면 된다는 어르신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은 건 아니지만, 뭣에 홀린 듯 나는 한 달 후에 이장이 됐다. 사람일 참 알 수 없다. 내가 벌인 일조차 내가 원해서 한 것인지, 아닌지 아리송할 때가 있으니 말이다.

얼떨결에 이장이 된 후 제일 먼저 나를 놀라게 한 건 새벽 6, 7시부터 울어대는 전화벨 소리였다. “물이 안 나와요!” “전기가 나갔어요.” “방송이 안 들려요. 뭐라고 말한 거예요?” “할 얘기가 있으니 좀 들르세요.” “아버지 산소 벌초를 해야 되는데, 사람 좀 구해주세요.”

전화뿐만이 아니었다. 저마다 다급한 사정으로 이장을 직접 찾아왔다. 고장이 난 지 몇 년째 되었지만 불편한 줄 몰랐던 우리 집 먹통 벨이 이참에 한몫을 톡톡히 했다. 마을 분들은 집 앞에 내 차가 세워져 있으면 다짜고짜 들어오신다. 그런데 벨소리가 나지 않자 문을 두드리다가, 기척이 없으면 현관문을 발로 걷어찼다. 기다리다 못해 부엌 쪽 창문을 열고 그 앞에 놓인 냄비를 작대기로 두드리시는 분도 있었다.

‘이장’이라는 직명은 고려 말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장이 행정부처와 마을 사이의 연결고리가 되어 일을 맡아 한 지 꽤 오래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면사무소와 시청에서도 연신 연락이 온다. 면사무소에서 주민들의 생활에 이렇게 시시콜콜 관심을 갖고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는지 그 전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장님, 어디세요? 지금 가려고 하는데요.”


모든 약속은 지금, 바로, 당장 마을에서 이루어진다. 스케줄을 보고 며칠 뒤, 혹은 몇 시간 뒤에 약속을 잡는 데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에겐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사람은 환경친화력이 가장 뛰어난 동물이다. 이장이 뭘 하는 건지도 모르고 덜컥 받아든 자리지만 나 또한 밖이 희뿌옇게 밝아오기 전에 일어나 새벽부터 망설임 없이 전화를 주고받고, 불쑥 누군가가 찾아와도 바로 뛰어나가 맞이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어쩌면 이 땅에서 농경민으로 살아온 수천 년의 역사를 내 몸의 DNA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해뜨기 전 들에 나갔다가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드는 시골에서의 삶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내 삶의 원형이었음이 틀림없다.


김소양 | 추곡리 이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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