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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밋밋하게 짝수로 끝나지 않고 하루가 돌출해 있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기해년 삼백예순다섯 날은 그날로 수렴되어 가고 있다. 등대처럼 반짝거리는 그 마지막 날에 바닷가나 산정으로 가서 일출을 보면서 또 살아갈 날을 가늠해 보고 그에 따른 많은 결심을 한다. 얼마 남지 않은 그날을 염두에 둔 마지막 주말.

채널의 맛은 돌리기보다는 끄는 데 있다. 뻔하고 빤한 텔레비전을 간단히 처치하고 남한산성을 찾았다. 총각 시절 꽤 자주 찾았던 예전의 정취가 그런대로 남아 있다. 오랜만에 걷는 길은 더욱 낮고 단단하게 다져졌다. 한 해 한 번 떨어진 낙엽들이 수북하다. 연말을 기념하여 공중의 말씀 같은 눈발을 기대해 보았지만 하늘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울퉁불퉁 성곽길과 호젓한 오솔길을 번갈아 걸었다. 추운 날씨 속에서도 꿋꿋한 햇살을 받아 소나무 그림자가 내려앉고 그 사이로 내 그림자도 눕는다. 문득 이 고요하면서도 번잡한 숲에서 그림자들끼리는 뭔가 내통하지 않을까, 궁리가 일어났다. 이 세상의 배후는 어딜까, 궁금증도 솟아났다.

남한산성. 파란만장으로 점철된 이 조그만 산중도읍은 서울을 압축하여 옮겨놓은 듯 행궁은 물론 종로도 있고 시구문도 있다. 이윽고 가장 높은 곳에 오르니 소나무와 이승만 대통령이 기념식수했다는 전나무가 우뚝하다. 너무 늙은 나무들 아래 솔방울이 드문드문 떨어졌다. 수어장대(守禦將臺). 기단은 허물어지고 2층 건물은 낡아도 일필휘지는 늠름하기만 하다. 하늘을 배경으로 눈썹같이 꿈틀거리는 글씨를 보며 생각해 본다.

한 해가 가는 건 누가 채널을 돌리는 것. 솔방울이 툭, 떨어지는 건 따로 한 세상이 열리는 것. 땅으로 들어가는 솔방울의 전생인 듯 아직 가지에 의연히 달려 있는 솔방울이 불쑥 마음을 치고 들어왔다. 바람에 날리는 송화 가루를 포착해서 자라난 열매. 봉함엽서처럼 씨앗을 간직하느라 입을 앙다문 듯 야무지게 또랑또랑하던 솔방울. 이제 꼭 품고 있던 씨앗을 모두 출가시키고 활짝 벌어진 솔방울들. 그들의 저 활연대오(豁然大悟)가 자꾸자꾸 내 마음을 빼앗아간다.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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