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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똥나무를 처음 본 건 청와대 뒤 북악산에서였다. 군인들이 지키는 울타리의 한 축을 담당하며 숙연하게 서 있는 나무. 머리를 바싹 깎은 이등병의 군기가 느껴졌다. 벽돌처럼 오와 열을 맞춘 촘촘한 잎들 사이로 정말 쥐의 똥 같은 까만 열매가 몇 개 숨어 있어 제 이름의 연유를 짐작하게 했다. 한번 들으면 쉬이 잊을 수 없는 독특한 이름이었다. 인왕산은 퍽 자주 가는 산이다. 어느 해 여름 땀을 잔뜩 흘리고 출렁출렁 내려왔을 때 국궁터인 황학정의 뒷덜미쯤에서 그 나무를 만났다. 한때 호랑이를 키울 만큼 깊고 무성했으나 이제는 조금 떨떠름해진 인왕산의 녹음. 그래도 잘 단장된 숲에서 마구 뻗어나가지 않고 숨어서 웅크린 채 영리하게 세상을 관조한다는 느낌의 나무. 쥐똥나무는 그런 인상을 내게 심어주었다.

시절이 수상하고 기후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날들의 연속이다. 겨울이라고 눈 한 톨 구경하지 못한 채 이 계절이 지나가는가. 눈 펄펄 내리지 않는 겨울이 매미 소리 하나 없는 여름으로 연결되는 건 아닐까. 조금의 기미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와 김해 불모산에 들렀다. 아직 그건 기우일세, 안심하라는 듯 바람은 차갑고 산에는 엄연한 질서가 있다. 아직 꽃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바짝 마른 낙엽의 세상이다. 그 자지러지는 소리 속에서 녹색이 눈에 띄었다. 아, 저건 반상록성이라서 마구잡이로 다 떨어지지 않아요. 꽃동무의 말끝에 쥐똥나무가 의젓하게 겨울을 견디고 있지 않은가. 

처음 보자마자 특이하게 기억했으나 이제껏 제대로 호명을 못해준 쥐똥나무. 오늘 조금 스산한 풍경에서 올해의 간지와 연결되면서 단박에 홀랑 마음을 뺏어간 쥐똥나무. 어쩌면 그간 내 주위에서 어슬렁거리다가 경자년이라고 이제야 이렇게 영리하게 툭 달려드는 것일까. 푸들푸들 고두밥처럼 가지 끝에 촘촘히 달리는 향기로운 꽃들을 떠올리며, 쥐띠해의 첫 산행에서 특별히 반갑게 만난 쥐똥나무를 여기에 적는다. 쥐똥나무, 물푸레나무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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