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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리출판의 목록에는 웰다잉 시리즈가 있다. 목숨을 받은 이상 누구도 피해갈 수는 없는 마당에 죽음을 제대로 바라보고자 기획한 책들이다. <죽음준비학교> <애도> <해피엔딩> 등 열 권을 훌쩍 웃돈다. 이런 사정을 헤아렸는지 영화사에서 가끔 제의가 들어온다. 죽음을 다루는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티켓과 책을 교차 부조해서 마케팅을 하자는 것이다.


<엔딩노트>는 그렇게 해서 보게 된 일본 영화였다. 주인공은 가짜 죽음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었다. 스크린에서 전개되는 죽음은 육체의 진짜 스러짐이었다. 회사에서 은퇴한 주인공은 제2의 인생을 설계할 꿈에 부푼다. 그러다 덜컥 위암 말기 진단을 받는다. 그는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원치 않아 얻었기에 농담 삼아 인생의 혹처럼 여긴다는 셋째딸은 영화감독이다. 그는 죽음 준비를 꼼꼼히 하고 ‘혹’은 아빠의 투병 생활을 촬영해 나간다.


영화 <엔딩노트> (출처' 네이버 영화')


죽음이라고 반드시 그리 무서운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모든 게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했는데 아무렴 죽음도 예외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죽음에 임박해서는 아내와 아들, 딸, 사위, 며느리, 손자들과 작별인사를 나눈다.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여기가 바로 천국이 아닐까? 어느 날엔 촬영하던 ‘혹’마저 떼어내버리고 부부만의 시간을 갖는다. 시들어가는 남편의 손을 잡고 뜨거운 눈물을 쏟는 아내의 고백. “당신이 이렇게 좋은 사람인 줄을 미처 몰라 미안해요.” 영화가 시작할 때 장례식 장면이 나온다. 약력 중에 이런 글씨가 보인다. 향년(享年) 65세. 처음 보는 단어가 아니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향년이라는 말이 새삼스러워졌다.


<아무르>는 프랑스 영화다. 평화로운 노후를 보내던 음악가 출신의 노부부. 어느 날 아내가 깜빡 자신도 모르는 증세를 보인다. 아내는 혹 치매에 걸리더라도 병원에는 보내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한다. 상황은 점점 악화된다. 하나뿐인 딸은 어머니를 가끔 찾아와 말로만 어찌할 뿐 전적으로 보살필 수는 없다. 그에게는 그의 가정이 있는 것이다. 엄마와 딸의 어찌할 수 없는 거리. 남편은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한다. 하루가 다르게 가라앉는 아내를 지켜보다가… 죽음은 참 순식간에 벌어지는 일인가 보다.


그동안 아내의 고개를 얌전히 받쳐주기만 하던 베개. 그 베개가 돌연 얼굴을 덮치면서 아내의 목숨도 끝장이 난다. 남편은 차마 아내의 목을 직접 조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남편은 베개를 누르고 그 베개가 아내의 숨을 짓눌렀던 것이다. 그곳까지의 간격은 참 짧은가 보다. 맨발인 채 몇 번의 바둥거림만으로 아내는 그곳으로 건너간다. 편안하게 누웠던 침대에 막대기 같은 딱딱한 노구를 남기고.


제 65회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미하엘 하네케 감독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AFP연합)


내가 너무 기대를 해서 그랬나.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지만 <아무르>에 그리 후한 점수를 줄 생각이 없다. 어떤 선택을 하려면 그에 합당한 과정이 있어야 할 텐데 남편의 행동에는 그게 약간 모자란 듯했다. 아무르, Amour. 사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사랑이 하는 것이라면 인생은 누리는 것이다. <아무르>에는 향년이 없는 것 같았다.


임진년 보내고 계사년 맞이하는 와중에 위에 소개한 두 편의 영화를 연달아 보았었다. 이상은 스크린 속의 이야기이다. 영화에서 참 흔한 게 죽음이듯 실제 현실에서도 죽음은 늘 우리 곁에 가까이 들러붙어 있다. 스크린 바깥에서 실제로 벌어진 영화 같은 죽음을 뉴스로 접했다.


“폐암 간병 5년. 중환자실 아내의 호흡기 뽑은 남편. 아내가 중환자실에 옮겨진 다음날 오후 심씨는 바지 주머니에 접이식 과도를 들고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그는 두 간호사의 제지를 물리치고 영양 공급 튜브를 자른 뒤 인공호흡 튜브를 잡아 뽑았다.”(조선일보 2013년 1월22일자)


얼마 전에는 이런 기사도 있었다. “치매 아내 4년 돌보던 남편, 승용차로 저수지 빠져 동반자살. (…) 할아버지는 절대 요양원 안 보낸다며 할머니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내년이면 90살이 되는 할아버지가 언제까지 할머니를 돌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남긴 유서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이 길이 아버지, 어머니가 가야 할 가장 행복한 길이다.”(한겨레신문 2013년 5월14일자)


영화와 현실이란 차이도 있었지만 일본, 프랑스, 한국에서의 죽음은 각각 조금씩은 달랐다. 언제고 돌이킬 수 있는 죽음이 없듯 어디에서고 이해 못할 죽음 또한 없었다. 현실 속에 영화는 있고 그 영화 바깥에 현실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 현실의 둘레에 우리는 대롱대롱 매달려 살아간다. 잠시는 살아 있지만 영화가 끝나듯 삶에도 엔딩은 있다. 나의 경우는 어떨까. 죽음은 언제 나를 정통으로 맞힐까.


그 희미한 죽음의 얼굴을 어쩌다 떠올릴 때 내심 비비고 싶은 언덕이 있다. 나중 염라대왕님 앞에서 궁리의 도서목록을 들이대면 혹 정상참작을 해주시지 않을까, 걸어보는 허무맹랑한 기대.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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