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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 | 도서출판 궁리 대표


점심시간을 끼고 인왕산에 올랐다. 새해가 오면 산 아래 동네에는 바뀌는 것도 많다. 달력이 바뀌고 사람들의 나이가 바뀐다. 방이나 벽지를 바꾸고 싶은 이도 많을 것이다. 여기서 한눈에 보이는 청와대의 얼굴도 잠시 바뀐다. 그러나 인왕산은 그저 인왕산일 뿐 그랬거나 말았거나 그제 내린 눈을 품에 안고 묵묵히 서 있었다.


오랜만에 산을 오르자니 그냥 사무실에서라면 만나지 못했을 생각들이 멀리서 찾아왔다. 고향, 인생, 죽음 그리고 책. 이에 관해 신년에 걸맞은 궁리를 이리저리 해 보았다. 그런 좀 무거운 주제가 끊길 무렵이면 산을 구성하고 있는 풀, 돌, 나무 등 더욱 묵직한 것에 대한 생각을 밟아나갔다. 그리고 벌레와 곤충의 안부를 찾아 숲으로 궁금한 눈길을 던지기도 했다.



울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과 뒤로 보이는 인왕산에 밤새 내린 눈이 앉아 있다. (출처 : 경향DB)


깔딱고개에서는 작년에 자주 만났던 개미들 생각이 났다. 어느 금요일 어스름 무렵에 이런 추리를 한 적이 있었다. 어둠이 차츰차츰 몰려와 진하게 되었을 때, 등산객의 발길이 끊어졌을 때 그 적막한 인왕산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개미는 이런 정황을 재빨리 간파했을 것이다. 인간의 그늘을 벗어나는 이 절호의 기회를 그냥 흘려보낼까. 영리한 개미라면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치마바위 곁을 지나 하산하는데 멀리 범바위 능선이 눈에 들어왔다. 막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그때 어둑한 곳에서 한 그림자가 휙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덩치가 나만한 것 같았다. 내일의 휴일을 맞이하여 사람만하게 변장하고 변신하는 것. 분명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근무교대하는 군인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위틈으로 감쪽같이 숨어드는 개미인간이 아니겠는가! 내가 지금 미끌미끌한 산길에서도 끊임없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것은 혹 그 개미인간의 행방에 관한 작은 실마리를 찾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역시 개미들은 대단했다.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개미는 지금 느긋한 겨울잠을 즐기는 것일까. 어디에도 쉽사리 그 흔적을 노출시키지 않고 있었다.


인왕산을 오를 때 계절에 따라 특별히 생각의 품목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겪어온 것과 닥쳐올 것을 중심으로 사색의 무늬를 짜곤 했다. 그리고 위에 잠깐 적은 대로 과학소설 같은 이야기 한 자락을 슬쩍 끼워넣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좀 특별한 것이 하나 있었다. 나의 머릿속에는 인왕산 초입에서부터 아프리카가 계속 맴돌고 있었다.


인왕산의 허리에 해당하는 산중도로를 건너 가파른 길을 치고 올라갔다. 이내 반반한 쉼터 바위가 나왔다. 서울시내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경복궁과 청와대가 코에 닿을 듯해 사진 찍기에도 좋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경계병이 둘 지키고 서 있는 곳이기도 하다. 새해 덕담을 건넸는데도 경계병은 최소한의 반응만 보였다. 혼잣말인 듯, 물어보는 듯 뜬금없이 말했다. “아프리카가 어느 쪽일까? 그중에서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어디쯤일까요?” 


아프리카. 여기서 아프리카를 찾으려면 하늘만 보아서는 안될 것 같았다. 너무 먼 공중의 길이요,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방향이 아니겠는가. 차라리 땅에 붙어사는 개미한테 물어보는 게 더 지름길일 것도 같았다. 개미라면 인간은 도무지 흉내 낼 수 없는 방법으로 아프리카 개미와 내통하고 있을지도 모르잖는가.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찾듯 인왕산에서 아프리카를 찾는 나를 두고 경계병은 얼치기 산중처사 내지는 정신이 좀 맑지 않은 이로 치부하는 듯했다. 대놓고 거동수상자 취급은 안 해도 슬금슬금 피하려는 눈치였다. 아마 정신수상자로 여기고 업무일지에 기록할지도 모르겠다. 오늘 계사년 첫 등산을 인왕산으로 하면서 아프리카를 떠올린 것은 까닭이 있다. 작년, 그러니까 임진년 세모에 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보낸 한 통의 엽서를 받았다. 희망봉 근처 케이프반도의 수려한 풍광을 담은 그림에 코뿔소를 그린 우표가 붙어 있었다. 궁리에서 펴낸 책을 읽고 “개운한 만족을 느꼈”다면서 어느 독자가 보낸 것이었다. 엽서 말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엽서가 도착할 무렵 아마도 한국은 대통령 선거 열풍으로 후끈 달아 있지 않을까 짐작합니다. 그 즈음 인왕산에서 바라본 서울풍경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2012·12·03. Sandton, Johannesburg.”


아프리카. 그곳은 어디쯤일까. 바로 며칠 전 꽃산행을 함께하는 내 동무들이 아프리카로 떠났다.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느라 엄청 혼이 났었다. 지금쯤 그이들은 탄자니아의 응고롱고로 국립공원에서 꽃이며 야생 동물들과 흠뻑 교분을 나누고 있겠지. 남아프리카공화국. 엽서가 도착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리는 그곳은 얼마나 멀까.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민주화를 완성했다는 그곳은 공기도 다르겠지. 그나저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그 독자께는 오늘의 서울풍경을 뭐라고 전해줄까. 발 아래와 눈썹 너머를 교대로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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