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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엔 ‘6학년의 품격’이라 씌어 있었다. 6학년 친구 중에 연골무형성증을 앓고 있는 지체장애 6급 학생이 있었다. 또래에 비해 성장이 늦어 운동회가 설레기보다 스트레스를 받는 작은 아이였다. 그런데 이번 가을 운동회는 달랐다. 반 친구들이 깜짝 선물을 준비한 것이다. 등수를 가리는 100미터 달리기에서 뒤처진 이 친구를 반 아이들 모두가 기다렸다가 나란히 손을 잡고 결승선을 통과했다. 지켜보던 가족과 선생님은 물론 아이도 울며 결승선을 들어왔다는 보도를 봤다.

아픔을 품을 줄 아는 아이들의 품격이 놀라웠다. 신문을 펴기 두려울 만큼 사건이 많은 요즘 가슴 뻐근한 장면임엔 분명했다. 그런데 이 달리기 시합이 공정하다고 할 수 있는가. 육체적으로 확연한 차이가 나고 발육상태도 턱없이 모자란 아이를 같은 출발선에 세우는 것이, 교육적으로 어떤 의미일지 궁금했다. 그저 동일선에서 출발할 수 있는 것만으로 차이를 없앴다 할 수 있을까.

초등학생이 보여준 ‘행복한 달리기’는 어쩌면 노동운동이 보여줘야 할 모습이다. 대기업 노동자는 중소·영세기업 노동자와, 정규직은 비정규직과, 남성은 여성과 손을 잡아야 한다. 비장애인은 장애인과, 내국인 노동자는 이주노동자와 함께 ‘연대의 달리기’를 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의 노동운동은 그렇지 못하다. 어느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는 주간 2교대 근무로 2000만원이 넘는 성과급을 받을 때, 바로 옆 공단 하청 노동자는 밤샘근무에 최저임금을 받는다.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제조업의 모든 사내하청이 불법파견이라는 법원 판결이 나왔지만 이를 알리는 현수막은 찾아보기 어렵다. 통상임금 법원 판결 이행을 요구하는 목소리만 클 뿐이다. 자본의 탐욕에 제동을 걸고, 200만명에 달하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너끈히 품을 수 있는 판결이지만 민주노총엔 그 흔한 대책기구 하나 없고 평상시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다가오는 12월엔 민주노총이 조합원 직선제를 한다. 출범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그동안은 대의원 간선제로 위원장 선거를 치렀다. 직선제는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현장의 목소리가 왜곡될 가능성이 줄어들 것이란 얘기도 들린다. 정체된 민주노총에 활력을 주는 계기가 돼야 한다는 주문도 뒤따른다.

그런데 어떤 활력이냐는 것과 누구를 위한 활력이냐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탐욕을 멈추지 않는 자본과 이성을 잃은 정권에 맞선 투쟁을 이끌 지도부 구성도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외부 역학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노동계 내부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갈라져 있고 대기업과 중소·영세사업장의 차이는 갈수록 커진다. 우리가 만든 현실이 아니지만 그 현실에서 살아가는 건 우리들이지 않은가. 각자 결승선을 향해 뜀박질만 하는 현실을 끝내야 한다. 아파하는 이들은 누구인지 고통당하는 사람은 또 어디에 있는지 이제는 돌아봐야 할 때다.

그런 면에서 이번 직선제는 노동계 내부를 면밀하게 진단하고 차이를 메우고 차별을 없애는 노력부터 시작해야 한다. 때만 되면 등장하는 대기업 노조 때리기가 지겹지도 않은가. 노동 탄압에 맞서 쉴 틈 없는 날들이며 하루하루 싸워내기도 버거운 시절이다. 그 어느 때보다 해야 할 일이 많은 민주노총이며 노동계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조합원 이해와 요구뿐 아니라 일하는 전체 노동자의 대표를 자임하는 조직이라면 더는 내부 문제에 등 돌려선 안된다. 그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삶에 지쳐 달리기에 버거운 작은 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것, 그것이 민주노총 직선제의 아름다운 달리기의 시작이다. 11월은 전태일 열사 기일이 있는 달이다. 아픈 달이자 아픔을 품는 달이다. 노동조합이 건강할수록 그 사회 복지 수준은 물론 민주주의가 건강해진다는 믿음을 민주노총이 보여줘야 한다.


이창근 | 쌍용차 해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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