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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슬프면서 좋은 거

opinionX 2017. 4. 11. 11:27

권여선의 단편 ‘손톱’에는 소희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소희 곁에 있어야 할 대상들은 다 떠나버리고 소희는 빚만 떠안은 채 성인이 된다. 스물한 살의 소희가 갚기엔 만만치 않은 액수다. 그녀는 이십만원으로 한 달을 살고 있고 출퇴근 시간을 급여로 환산해 머릿속으로 계산해볼 만큼 꼼꼼하다. 아니, 절박하다. 친구도 못 만나는 삶, 섣불리 친구도 못 만드는 삶이다. 방세가 오르거나 병원에 가는 일이 없다면, 착실하게 돈을 모아 스물여덟에는 빚을 다 갚을 수 있다. 그게 소희의 유일한 희망이다. 성실함만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한없이 불투명한 희망.

소희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돌아보고 자신이 처하게 될 미래를 내다보다 건물 쇼윈도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만다. “내가 어쨌다고? 내가 뭘, 뭘, 뭘? 뭘? 뭘? 뭘?” 그녀에게 삶은 단 한번도 개척해나가는 것이나 누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늘 ‘처하는 것’이었다.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 자신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간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태.

이쯤 되면 소희는 ‘헬조선’을 살고 있는, 아니 헬조선에 처해 있는 젊은이들을 대변하는 인물처럼 느껴진다. “슬프면서 좋은 거, 그런 게 왜 있는지 소희는 모른다.” 우리 중 대부분은 모르는 채로 내일을 맞이할 것이다. 각박한 현실 앞에 놓인 ‘왜’라는 질문은 너무 커다래서 보이지 않는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마음이 무거울 때 이 소설을 읽어서인지 나는 펑펑 울고 말았다. 소설이 섣불리 희망을 말하지 않아서, 행복할 거라는 암시조차 주지 않아서, 그런데 그게 더없이 적확한 현실이라서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잘될 거라는 확언이나 나아지리라는 보장은, 그 말을 듣는 당사자에게는 멀리 있는 말, 아득한 말이다. 마치 ‘미래(未來)’라는 단어가 “아직 오지 않았다”라는 뜻인 것처럼. 나의 눈물은 위안의 눈물이라기보다 공감의 눈물에 더 가까웠다.

공감은 자기 자신도 그렇다고 느끼는 기분이다. 자기 자신도 그런 상황에 처한 적이 있었다는 데서 오는 마음의 끄덕임이다.

공감에 시공간의 제약이 있을 리 없다. TV로 딱한 처지에 처한 사람들을 보며 전화기를 집어 드는 것도, 대형 참사 앞에서 함께 눈물 흘리는 것도 우리가 공감하는 존재이기에 가능한 행동이다. 문학작품을 많이 읽으면 공감 능력이 커진다. 생면부지의 누군가에게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기도 하고 때로는 그가 내 손을 잡아주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공감은 불러일으키는 것에서 가는 것, 마침내 도달하는 것이 된다.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다르게 된다.

정신없이 바쁠 때일수록 나는 더 갈급이 나서 문학을 찾았던 것 같다. 내가 바랐던 게 위안인지 격려였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나는 늘 문학작품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안도했다. 그것을 단순히 요새 유행하는 ‘힐링’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고, 나는 그저 세상에 있는 단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며 경건해졌다. 세상에 누구도 같은 사람은 없고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을 산다. 그의 삶과 나의 삶에서 공통된 감각을 찾고 결이 유사한 순간을 발견하면 누구든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 흔들림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 공감하는 사람이 될 확률이 높다.

문학작품은, 아니 좋은 문학작품은 무턱대고 “힘내”라거나 “잘될 거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여기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슬프면서 좋은 거, 그런 게 왜 있는지 소희는 모르지만, ‘슬프면서 좋은 거’ 때문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내일을 생각할 수 있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사실, 나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함께 앓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은 절로 뜨거워진다. 그것은 빤한 위로나 날카로운 조언보다 힘이 된다. 공감이 위안에 가닿는 놀라운 순간이다.

손톱은 손가락을 보호하지만, 손 전체를 보호해주지는 못한다. 인간이 손을 내밀고 맞잡는 존재인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문학작품 속에는 당신의 손을 기다리는 무수한 손들이 있다. 슬프면서 좋은 거, 그게 바로 문학이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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