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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을수록 새해 소망은 소박해진다. 거창한 계획을 세우면 오히려 연말에 씁쓸해진다고 경험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12월31일과 1월1일 사이의 그 언제쯤 “아는 척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지난 한 해를 치밀하게 반성하고 생각해낸 계획은 아니었다. “SNS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자”도 새해 계획의 후보로 떠올랐으나 도저히 지킬 자신이 없어서 “아는 척하지 말자”를 거의 억지로 새해 계획으로 생각해낸 것 같다.

대충 생각해냈기에 참으로 빈틈이 많은 계획이었다. 겸손하게 살자는 다짐 정도로 이해하면 슬쩍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새해가 지난 며칠 후 어느 책에서 비트겐슈타인의 그 유명한 명제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를 다시 만나게 되자, 나의 새해 결심은 이른바 무식해서 용감한 경우에 해당됨을 깨달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가르치는 게 직업인 사람은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순간 존재의 이유가 의심받는다고 생각하기에, 무엇이든 반드시 “설명”하고 싶어 한다. ‘설명할 수 없음’을 숨기려고 오히려 더 열성적으로 설명하려 들 때, 더 이상 해서는 안되는 악행 중 하나로 꼽히는 이른바 ‘훈장질’이 시작된다.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단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척하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훈장 취급받는 것이다. 그 훈장이 “설명”할 수 없기에 ‘말할 수 없는 것’에 부딪히면 설명하지 않으면 된다. 훈장질을 하지 않도록 돕는 유일한 방법이다. 단순한 이치인데도 설명의 입이 유독 발달한 사람은 이렇게 쉬운 해결책을 선택하지 못하고 망설인다.  

‘빅이슈’, 이른바 주거취약계층 재활 잡지이다. 1991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현재 11개국에서 발행되고 있다. 주거취약계층에게 합법적인 일자리를 제공해서 경제적인 자립의 기회를 주자는 취지로 만들어지는 잡지다. 한국어판은 2010년부터 발행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는 지하철역 입구나 거리에서 판매원으로부터 구입할 수 있고 다른 지역의 경우 정기구독이 가능하다. 홈리스가 ‘빅이슈’ 판매원이 되기로 결심하면 2주 동안의 임시 기간을 거친 후 정식으로 ‘빅이슈’를 팔 수 있다. ‘빅이슈’는 한 권에 5000원에 판매되는데, 5000원 판매액 중 절반인 2500원이 ‘빅이슈’를 판매하는 사람 즉 ‘빅판’에게 돌아간다. ‘빅이슈’는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정보에 의거해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빅이슈’는 사물이다. 사물은 설명이 가능한 대상이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는 다르다. ‘빅이슈’를 판매하는 사람, 즉 ‘빅판’을 설명할 수 있을까? 직업 명칭은 그 사람이 수행하는 기능은 가리켜도 그 사람의 인생을 설명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이 수행하는 기능과 그 사람 사이의 격차를 무시하고 혹은 외면하고 감히 그 사람을 기능만으로 설명하려 든다면 오만하다. 오만함을 감지했다면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게 필요하다.

‘빅판’이라는 기능을 수행하는 ‘임상철’씨라는 사람이 있다. 18년 동안 홈리스였고 6여년간을 ‘빅판’으로 지내고 있다. 임상철씨는 현재 홍대입구역 3번 출구에서 ‘빅이슈’를 팔고 있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는 혹은 자신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했고, 그 글과 그림을 ‘빅이슈’에 끼워 판매했다. 설명의 대상이기만 했던 사람이, 자신을 설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글은 <오늘, 내일, 모레 정도의 삶>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된다.

추천사를 써달라는 요청으로 이 책의 원고를 읽었다. 아니 임상철씨가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했던 사회학자의 오만을 되돌아보는 반성문의 형식으로 추천사를 썼다. “설명”하는 입만 발달한 전문가로만 가득 찬 사회, 자신에 대하여 발언할 기회를 골고루 보장하지 않는 사회는 문제가 있다. 늘 자신이 수행하는 기능이 “설명”의 대상이었던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간은 귀하다. 그 귀하고 흔하지 않은 순간을 맞이하면 우리는 설명하는 입을 잠시나마 닫고 경청의 귀를 쫑긋 세워야 한다.

오늘 ‘빅이슈’를 팔고 있는 임상철씨를 홍대입구역 3번 출구로 만나러 갔다. 그리고 이 책의 독자에게 꼭 전할 말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사람들은 길거나 짧은 인생의 여정에서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면서 살아갑니다. 저도 저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고 지금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는 “나는 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마음으로 삶을 살아나갈 생각”이라며 자신의 인생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빅판’ 임상철은 ‘빅이슈’를 팔지만, 사람 임상철은 예술가가 되려는 꿈을 포기하지 않은 인생을 살고 있다. 그가 파는 ‘빅이슈’엔 ‘빅판’의 기능과 사람 임상철의 꿈이 담겨 있다. 그렇다. 누구나 기능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다. 임상철씨 덕택에 새해 결심을 바꾸었다.

새해는 나에게 입을 여는 시간만큼이나 귀를 활짝 열고 듣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노명우 아주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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