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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지거나 잘려나가 생긴 조각에서 쓸모를 찾아낼 수 있을까? 부서진 병 조각이나 조각난 헝겊 따위에 주목하는 이는 드물다. 평범한 우리는 조각의 이런 처지를 닮았다. ‘불편한 진실’이다. 어찌 나를 감히 헝겊 쪼가리 따위와 비교하냐며 심기가 불편해질 수도 있다. 냉정하게 생각하자. 만인은 평등하다는 주장의 환상에 취하지 말자. 세상을 뒤흔드는 권력이라는 도구를 손에 쥐고 있지 않다면 우리의 사실상 처지는 조각 신세에 가깝다.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지 않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이곳의 속사정을 감춤 없이 그대로 드러내기에 충분한 이름은 무엇인가? 어떤 이에게 여기는 한강의 기적을 낳은 자랑스러운 조국 대한민국이다. 다른 사람에게 여기는 도망가고 싶으나 뾰족한 방도가 없어 체념하고 그냥 저주하며 살아가는 ‘헬조선’이다. 결론이 정해진 판단을 내리기 전에 먼저 조각 신세인 사람들의 속사정부터 살펴보자.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지금’ ‘여기’엔 한편으로 절망스럽게 바스러진 조각을 연상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제출하지도 못할 사표를 늘 품고 다니는 회사원, 공무원 시험에 인생을 건 노량진의 젊은이, 쉬지 않고 폐지를 수집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노인, 일요일까지 일하다가 결국 과로사로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 로또 복권 1000장과 함께 백골 상태로 발견된 사람,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스펙을 수집하고 있는 대학생, 고독한 미식가도 아니면서 어쩔 수 없이 혼자 밥 먹어야 하는 사람, 알 수 없는 이유로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 누구를 향하는지 알 수 없으나 잠시도 쉬지 않고 욕을 내뱉고 있는 노숙인이 ‘지금’ ‘여기’에 조각의 신세로 있다.

다행히 ‘지금’ ‘여기’엔 가능성을 품고 있는 조각도 발견된다. 동원되는 국민에서 어느 사이 원하는 국가를 상상하고 권력자에게 요구하는 시민으로 변화한 촛불을 든 사람, 유행 따위에는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으로 무장한 힙스터, 소녀상을 지키며 과거를 망각하라고 강요하는 부당한 미래를 거부하고 있는 사람들,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닌” “당신이 나를 존중해주기를 요구”하고 있는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등장인물과도 같은 사람도 여기에 있다.

홀로 있을 때 쪼가리 취급받던 조각도 서로 잇대어져 조각보를 구성하면 비단보자기와 비교할 수 없는 효과를 낸다. 하지만 낙관하지 말자. 절망적인 조각이 늘어나면 그 조각보는 결국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낸다. 그래도 가능성의 조각이 늘어나면 그 조각보에선 희망의 빛이 새어 나온다. 조각들을 이어 만든 조각보는 헬조선의 투시도도, 희망의 지도도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지닌다.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 그래도 희망의 조각보를 기대한다면 그 첫걸음은 현실과 덤덤하게 대면하며 아직 조각보로 기워지지 않은 조각들의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하지 사이야흐(Haji Sayyah)는 1859년 여름 옷차림에 빵 세 덩어리만 들고 이라크의 옛 이름인 술타나바드를 떠나 18년 동안 유럽과 미국, 일본, 중국, 인도, 이집트까지 여행했다고 알려진 전설적인 여행가이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 실은 얼마나 비범한지 발견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았다고 한다. 여행 끝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왕이었다면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왕은 가난한 사람들과 섞여 살 수 없지 않은가.” 우리는 왕이 아닌 조각의 처지라 차라리 다행이다.

왕이 아닌 우리 시민은, 세상을 구성하는 조각들을 서로 구경한다. 그리고 판단한다. 어떤 이의 인생 조각을 보고 최소한 저렇게 살지는 말아야겠다고 결심하기도 하고, 어떤 이의 인생 조각에선 가능하다면 감히 저 사람처럼 이 인생 살아내고 싶다고 욕심부려보기도 한다. 저렇게 살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게 하는 ‘반면교사’의 인물이 우리가 살고 있는 조각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아질수록 세상은 그나마 견딜만 한 곳이 될 것이다. 사람됨이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조각보에서 늘어날수록 아련해진 단어 ‘사는 맛’이 되살아 올 것이다.

조각보는 매일 매일 새롭게 짜이는 직물이다. 매일 짜이는 직물이 일년의 직물이 되고, 일년의 직물이 모여 인생의 조각보가 된다. 한 명의 실이 또 다른 실과 얽히면 어떤 실은 씨줄이 되고, 다른 실은 날줄이 된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는 희망의 조각보를 꿈꾸는 ‘지금’ ‘현재’를 연상시키는 구절로 시작된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자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들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했지만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말하자면, 현재와 너무나 비슷하게도, 그 시절 목청 큰 권위자들 역시 좋든 나쁘든 간에 극단적인 비교로만 그 시대를 규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디킨스가 묘사한 시대 풍경은 반복되지 않는다.

이제는 목청 큰 권위자가 아니라 조각의 신세인 우리가 조각보의 색과 형태를 결정할 때이다. 비록 아직은 ‘절망의 겨울’이지만 ‘희망의 봄’을 지나 2017년 우리 모두 새롭게 짜야 할 ‘인물조각보’는 그래서 궁금하다.

노명우 | 아주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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