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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춥다. 대한이 지나고 나서 더 추워진 날씨에 몸과 마음이 모두 춥다. 내린 눈이 쌓여 며칠씩 머무는 것이 참 오랜만이다. 그나마 때 묻지 않고 희게 쌓여 있는 눈으로 기분이 좀 나아지기도 한다. 국립수목원의 박물관 앞에는 기온에 민감해 간혹 일 년에 두 번씩 꽃을 피우기도 하는 독특한 벚나무 품종이 있는데 한동안 따뜻했던 겨울 날씨에 그만 꽃봉오리를 내보내 버렸고, 추위에 피지 못한 채 얼어 버렸다. 아깝기도 하여라! 추위에 피해를 입는 것은 항상 추울 때가 아니라 갑자기 추위가 닥쳐올 때이다. 비바람이 불어도, 혹독한 가뭄이 들어도, 예측하고 준비하여 적응된 나무들은 잘 견뎌내는데 이 나무들은 대개 뿌리를 땅속 깊이 단단하게 박고 있다.

춥기는 나라의 사정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이 초유의 어려움들은 물론이고, 핵으로 위협하는 예측불허의 북한이 있고, 새로운 대통령을 맞이한 미국, 힘과 생각이 특별한 이웃나라 중국과 일본이 있고, 외환의 동향에 따라 함께 휘청거리는 산업구조 등등. 세상의 바람과 추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참 어렵고도 고독한 나라이다. 우리나라는 땅속에 얼마나 깊고 굵은 뿌리를 뻗고 있는 것일까! 저력이 있어도 뿌리째 흔들리면 나무는 살기가 참 어려운데….

뿌리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식물의 밑동으로서 보통 땅속에서 식물체를 떠받치고 수분과 양분을 빨아올리는 기관’으로 정의되어 있다. 세 번째 정도에는 ‘사물이나 현상을 이루는 근본을 비유하는 말’이라는 뜻도 있다. 보이지 않아도 나무를, 혹은 우리를 지탱하는 뿌리는 수관이 울창한 만큼, 어려운 환경을 견뎌낸 만큼 깊고 견고하다. 나무에 비료를 줄 때 밑동 근처만이 아닌 나무줄기가 펼쳐진 곳만큼, 널찍하게 주는 이유는 그곳까지 뿌리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굵고 단단한 나무뿌리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원뿌리에서 분지한 곁뿌리, 다시 여기서 나온 잔뿌리들이다. 잔뿌리 끝의 표피세포는 머리카락처럼 신장된 뿌리털과 생장점, 생장점을 덮어 보호하는 뿌리골무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표면적을 증가시켜서 물과 무기물을 흡수함으로써 나무를 살아 있게 하는, 진짜 중요한 역할이 이토록 작고 섬세한 부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간혹 우리는 커다란 암벽 틈새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소나무를 보면서 강인한 생명력에 감탄하곤 한다. 하지만 이 바위를 뚫는 강건함도 그 시작은 어린 나무의 여리고 가는 뿌리 끝이 바위틈 어딘가에 나 있는 틈새를 찾아내 들어가는 일이다. 아주 빨리 자라는 경우 시간당 1㎜, 그러니까 하루에 2~3㎝나 자라기도 하는 이 뿌리털은 점차 굵은 뿌리로 자라 그 터에 자리를 잡게 된다. 표면적을 넓히므로 효과적으로 물을 흡수하여 나무에 생명을 유지한다. 호밀 뿌리로 실험을 한 결과 5ℓ 정도의 부피를 차지하는 뿌리에 달리는 뿌리털의 표면적이 테니스 코트 2개에 깔아놓을 만큼 넓었다고 한다. 또 어떤 식물의 뿌리에서 하루 동안 자라는 뿌리털의 길이를 모두 더하면 9㎞에 달한다고 하니 정말 여리고 가늘어도 일선에 있는 이 존재들의 힘은 보통 국민들의 힘만큼이나 놀랍다.

나무만 그런 것이 아니다. 풀도 만찬가지이다. 이른 봄에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식물들은 대개 꽃이 아름답고, 잎보다 꽃이 먼저 피며 키가 작은 특징을 가진다. 다른 풀들이나 큰 나무에 햇볕이 가리기 전에 부지런히 살아가는 전략을 가지기 때문인데, 이런 풀들의 공통점은 뿌리가 깊다는 점이다. 예전에 이른 봄에 꽃이 피는 ‘앉은부채’라는 식물을 연구한 적이 있다. 보통 이 풀의 꽃색은 자갈색(정확히는 꽃을 둘러싼 포의 색이다)인데 노란색을 가진 개체들이 아주 드물게 있었다. 이 색의 차이가 서로 다른 종(種)이기 때문인지 그저 변이에 지나지 않는지가 학술적인 논란이었다. 곁에서 관찰하기 위해 한 포기를 캐기 시작했는데 지상부 꽃의 높이는 10㎝ 미만이었지만 뿌리가 1m에 달해 하루 종일 진땀을 흘린 경험이 있다. 언 땅을 녹이고 꽃을 피워낸 저력이 바로 이 깊고 굵은 뿌리에서 기원하였던 것이다.

뿌리는 때론 변신을 하기도 한다. 뿌리에 특별히 양분을 저장하고 싶을 때는 덩이뿌리를 만드는데, 바로 우리가 겨울철 맛있게 먹는 고구마가 그 경우이다. 대기 중에 공중습도가 많을 때에는 공기 중에 뿌리를 내리기도 하는데 이를 기근(氣根)이라 하며 열대우림에 나무에서 줄줄이 내려오는 뿌리가 바로 이것이다. 기근은 낙우송처럼 물속에 잠겨 숨쉬기가 어려울 때 땅 위로 올려보내기도 한다. 때론 뿌리 끝에 뿌리혹박테리아가 공생하도록 허락하면서 공중의 질소를 양분으로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한다.

나무가 이유 모르게 죽어가는 경우를 가끔 만나는데 그 원인을 찾다보면 물빠짐이 안돼 고인물에 뿌리가 썩어가거나, 몰래 묻어둔 쓰레기나 폐기물 등에 뿌리 끝이 닿아 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눈으로는 안 보였던 이 근본적인 문제를 바로잡는 일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굵은 뿌리와 실뿌리가 연결되어 어떤 어려움도 버텨내며 생명의 물이 순환되어 살아가는 뿌리깊은 나무이길, 봄이면 어김없이 싱그러운 새순이 돋고 여름엔 녹음이 우거져 풍성하며 가을이면 아름답게 물들고 겨울을 굳건히 견뎌 매년 새봄을 맞는 영원히 무궁한 나무이기를 소망해본다.

이유미 | 국립수목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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