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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국회에서 ‘개헌 공론화를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국회 개헌특위의 여당과 야당이 정부형태 등 핵심쟁점에 합의하지 못해 개헌이 사실상 교착상태에 빠져있으므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의 사례를 개헌에 적용하자는 것이었다. 앞으로 이처럼 공론화와 숙의민주주의를 통해 사회적 현안을 해결하려는 요구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공론화란 ‘공공의 사안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이 존재할 때, 논의를 통해 입장 차이를 좁힘으로써 공익에 부합하는 공론(公論)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서로 다른 입장이 좁혀지는 것은 ‘특정 사안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논의함으로써 신중한 결정을 내리는’ 숙의(熟議)로 가능하다. 신고리 공론화위원회는 대체로 성공적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활동보고서를 보면 10%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고 학습을 했다고는 하지만 관련 주제를 깊이 들여다보는 구조화된 토론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학습도 중요하지만 구성원 간의 역동적인 토론과 상호작용을 통해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다양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면 숙의는 더 깊고 넓어졌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초등학교를 포함한 각급 학교에서 대형 강의를 줄이고 소그룹 토론식 수업을 늘려가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밀도 있고 깊이 있는 토론을 위해서는 숙의민주주의에 퍼실리테이션(facilitation)을 결합할 필요가 있다. 퍼실리테이션은 사람들 사이에 소통과 협력이 활발하게 일어나 합의에 쉽게 도달하도록 하는 행위이고, 이런 일을 하는 전문가를 퍼실리테이터라고 한다. 인간의 소통과 협력은 물론 쉽지 않다. 세상은 이견, 자기주장, 정쟁, 갈등으로 가득하다. 신고리 원전에 대한 찬반 양론, 개헌특위에서 정부형태를 둘러싼 여야 갈등, 회사 내 부서 간의 갈등, 학교친구들 간의 편 가르기, 가족 간의 오해와 상처…. 이런 일들이 보다 쉽게 해결되도록 하는 것이 퍼실리테이션이다.

소통과 협력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대화란 ‘너와 내가 각자 의미의 시냇물이라고 한다면, 너의 의미와 나의 의미가 만나 더 큰 의미의 강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대화를 잘 설계하고 조직하면 밀실에 갇혀있던 생각이 광장으로 뛰쳐나오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집단 전체와 공익을 배려하는 넓은 생각으로 활짝 열리고, 부정적인 생각이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뀌는 혁신이 일어날 수 있다. 바로 숙의와 공론화가 지향하는 바이다. 더구나 이런 접근을 하면 앞뒤가 꽉 막힌 양자택일의 상황에서도 한층 지혜로운 제3의 길을 찾는 것이 가능해진다.

사람들 간의 성공적인 대화를 위해서는 다섯 가지 일이 일어나야 한다. ‘사람들의 적극적 참여, 정보·느낌·견해의 소통, 상대의 입장이 되어보는 공감(역지사지), 공동의 의미 발견, 미래 행동방향에 대한 합의’가 그것이다. 이 다섯 단계를 체계적으로 설계하고 조직하는 것이 퍼실리테이션의 영역이다. 이런 일을 위해서 퍼실리테이션은 수많은, 검증된 기법들을 갖추고 있다. 이번 공론화위원회에서 하루 이틀 교육받고 투입되었다는 ‘모더레이터(moderator·사회자)’와는 다르다.

신고리 공론화위원회는 우리 사회에서 비교적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받는 첫 공론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활동은 사실 ‘토론을 통한 숙의의 질 향상’보다는 ‘학습, 그리고 의견의 통계적 변화 추적’에 더 중점이 두어져 있었다.

사회적 현안의 해결을 위해 앞으로 끊임없이 제기될 공론화와 숙의민주주의를 한층 더 성숙시키기 위해서는 ‘깊고 넓은 토론’이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서 숙의민주주의에 퍼실리테이션을 결합할 필요가 있다. 이와 더불어 한국적 상황에 맞는 공론화, 숙의민주주의 방식을 찾아내고 사회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국가적 차원의 연구·개발 기구를 만드는 것도 적극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신좌섭 | 서울대 의대 교수·의학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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