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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신화의 포르투나(Fortuna)는 운명의 바퀴와 함께 등장한다. 포르투나의 바퀴는 예측할 수 없다. 멋대로 굴러가는 운명의 바퀴가 운(運)이라는 궤적을 남기고, 그 운이 행운과 부를 결정한다.

그래서 포르투나에서 유래한 영어단어 fortune은 행운이자 동시에 재산을 의미한다.

20대에 학자금 융자로 빚을 내기 시작하여 결혼비용을 마련하느라 빚을 늘리고, 아이가 생겨 전세든 자가든 집 마련하겠다고 빚을 또 낸 사람의 인생 동반자는 포르투나가 아니라 빚으로 만든 수레바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빚이라는 수레바퀴를 운행하는 그 사람이 신문을 펼쳤다. 신문기사에 따르면 전체 국민 중 땅 있는 사람이 31.7%이고, 그중 상위 1%가 땅값의 48%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상위 1%는 땅을 통해 개인당 평균 33억4000만원의 불로소득을 얻었고, 그 1%의 가구당 불로소득은 평균 100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 기사를 접한 그 사람이 불현듯 ‘인생역전’의 꿈에 사로잡힌다. ‘대박’이라는 백일몽은 그를 로또로 안내한다.

국보 1호 남대문을 마주 보고 있는 복권판매소가 있다. 복권판매소 앞엔 1등 당첨자를 수차례 배출했다는 홍보용 안내판이 서 있다. 복권 추첨 당일인 지난 토요일 명당이라는 그 복권판매소 주변을 에드거 앨런 포의 <군중 속의 남자>를 흉내 내며 서성였다.

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선, 나는 피상적으로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았으며 그 전체 관계에서 그들을 생각했다. 그러다 나는 세부사항으로 내려와 외형, 옷, 태도, 걸음걸이, 얼굴 그리고 표정 등 수없는 다양성의 세계를 세세한 관심을 갖고 바라보았다.”

과연 로또 추첨일답게 복권판매소 주변을 수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포가 그랬던 것처럼 복권판매소를 들락거리는 사람들의 외형, 옷, 태도, 걸음걸이, 얼굴과 표정을 유심히 살핀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지만 그들은 서로 눈길조차 나누지 않는다. 복권을 판매하는 사람과 사는 사람 사이에도 대화가 없다. 어떤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돈과 함께 로또 번호를 적은 쪽지를 건네며, 어떤 사람은 그저 “자동이오”라는 짤막한 말을 남긴다. 그들은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은 채 신속히 어디론가 사라진다.

2014년에 발행된 <복권백서>에서 그들이 숫자로 남긴 흔적을 찾았다. 경제적 한계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마지막 비상구로 복권을 살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과는 달리 통계로 드러난 복권구매자의 직업 분포는 다양하다.

무직인 사람은 전체 구매자 중 3.1%에 불과하다. 화이트칼라(25.8%)가 자영업(22.6%)이나 블루칼라(19.7%)를 제치고 가장 복권을 많이 사는 직업군이다. 화이트칼라 못지않게 주부(21.3%)들도 자주 복권을 산다.

가난한 사람만이 복권가게의 단골은 아니다. 오히려 소득수준이 낮은 사람(199만원 이하 6.7%)보다, 소득이 낮지 않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복권을 산다(월소득 200만원대인 사람 14.4%, 300만원대 34.8%, 400만원 이상 44.1%).

‘일확천금’을 바라는 사람을 비난하기는 쉽다. 왜 근면에 기대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요행에 맡기려 하냐고 타이르기도 쉽다. 그러나 부모 돈 60억원을 받아 세금 16억원만 내고 결국 300조원이 넘는 삼성전자를 차지한 후계자 이재용이 있는 한 복권 사는 사람만을 비판대에 세우자니 사실 민망하다.

노력하면 대가가 돌아온다는 희망이 있는 사회임에도 운에 자신의 인생을 맡긴다면 비난받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노력의 희망이 사라진 사회에선 운에 ‘인생역전’을 기대하는 사람을 나무라기 힘들다. 로또 판매량은 노력의 대가를 믿는 희망이 줄어든 만큼 늘어나는 것은 아닐까? 2005년에 로또는 매회 529억원어치, 한 해 동안 2조7529억원어치 판매되었다. 2016년엔 로또가 매회 679억원어치 팔려나갔고, 그해 누적 판매량은 무려 3조5995억원이나 된다. 그 증가분만큼 희망이 어디론가 사라진 건 아닐까?

매해 연말정산을 하며 한 해 수입을 정리한 ‘건물주’가 아닌 월급쟁이는 깊은 한숨을 쉬고 나면 ‘기승전결’이 아닌 ‘기승전-로또’를 마음에 새기며 짬을 내 복권판매소에 들른다. 나 또한 연말정산이 끝나면 언제나 로또를 샀고, ‘대박’의 백일몽을 꾸고는 했다. 평범한 인생의 연말풍경이다.

<노명우 | 아주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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