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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여적]번역 대결

opinionX 2017. 2. 22. 10:17

소설가 안정효씨는 국내 1세대 번역가로 꼽힌다. 1975년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한국어로 옮긴 것을 시작으로 42년간 160여개 작품을 번역했다. 그는 번역은 ‘반역’이라거나 ‘제2의 창작’이란 말을 싫어한다. “번역은 원문보다 나을 수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번역가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언어의 다중적 의미를 간과하는 오역(誤譯)이다. ‘프린스(prince)’는 대부분 ‘왕자’로 번역하지만 영화와 소설에서 왕자를 뜻하는 경우는 10%도 안된다. 영화 <벤허>에선 ‘족장’,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선 ‘대공’, 마키아벨리의 저작에선 ‘군주’라는 뜻으로 쓰였다.

번역은 문화 간 통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일본의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1968년 <설국>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국 번역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의 공이 컸다. 사이덴스티커는 <설국>에 묘사된 탐미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풍광을 탁월하게 형상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해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수상하는 데도 영국의 젊은 번역가 데버러 스미스가 큰 역할을 했다.

어제 서울 세종대에서 국제통번역협회 주최로 ‘인간과 인공지능(AI)의 번역 대결’이 펼쳐졌다. 지난해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과 같은 인간과 AI의 대결이었다.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출신인 번역 전문가 4명이 구글·네이버·시스트란의 AI 번역기와 경쟁했다. 문학과 비문학 분야로 나눠 4개 지문을 인간은 50분 이내, AI번역기는 10분 이내에 영한, 한영 번역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이번 대결은 인간의 압승으로 싱겁게 끝났다. AI 번역기는 속도에서 앞섰으나 정확성과 표현력에선 인간 번역 전문가들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국제통번역협회 측은 “AI 번역기가 완벽하다 해도 관용어와 상용어의 번역은 인간의 영역이어서 당분간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유엔 미래보고서 2045’는 30년 뒤 사라질 직업 중 하나로 번역사를 꼽고 있다. 어느 쪽이 맞을지는 알 수 없지만 번역만큼은 인간의 영역으로 남았으면 한다. 번역은 기술이 아닌 인간의 생각과 가치, 감정을 옮기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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