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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하게 내린 비는 가만가만 대지에 스며든다. 아직 다가올 막바지 추위가 남아 있긴 하지만, 지난밤에 내린 이 조용한 비는 봄비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봄을 재촉하는 비임에는 틀림없다고 느껴진다. 매번 봄이 오건만 그래도 얼었던 대지가 녹아 흙냄새를 풍기기 시작하고 유난히 모질고 힘겹던 겨울이 가는 대신 새봄이 오고 있다는 것이 새삼 감동으로 느껴진다. 땅속에선 수많은 생명들이 새 계절을 준비하느라 분주할 것이다. 땅속에선 새싹들이 삐죽삐죽 올라오고 유난히 작고 사랑스러운 봄꽃들이 피어나겠지! 제주도 한라산 자락, 눈 속의 세복수초, 서해안 섬에서 올망졸망 피어날 변산바람꽃, 아님 남도의 들판에서 웃고 있을 진분홍빛 광대나물. 올해는 누가 먼저 꽃소식을 보낼까?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퍼지고 마음은 따뜻해진다.

꽃들은 언제나 행복이다. 특히 산야에 절로 나고 지는 이 땅의 우리 꽃들은 더욱 그러하다. 그 꽃들에 눈길이 가고 마음이 열리고, 카메라 앵글을 열어 섬세하게 집중해본 이라면 그 순간이 주는 소소한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 그 감동이 잔잔하게 퍼져 다시 내가 맑아지는 느낌을 잊지 못할 것이다.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꽃의 하나인 변산바람꽃.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들은 삶 속에서 우리 꽃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요즈음 청탁금지법(김영란법)으로 인해 일정한 가격 이상의 선물용 꽃을 보내는 데 제약이 생기면서 꽃농가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래서 한 테이블에 하나씩 꽃을 올리자는 운동도 시작되었다. 특별한 사람이 특별하게 향유하는 꽃이 아니라 꽃을 접하는 방식을 바꾸어 일상에 꽃을 두고 살자는 일일 것이다. 격식이나 인사치레가 아닌, 내가 스스로 꽃을 골라 곁에 두거나 좋은 이에게 건네는 일이 일상이 되기 위해선 우선 어려서부터 꽃과 접하는 시간이 훨씬 많아져야 하며 그 방식도 다양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정원 문화의 확산이 그 방법의 하나이다. 분명 예전에 비해 공원이나 가로 화단에 꽃들을 심는 공간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국가적으로는 산림청이 정원을 조성하고 진흥하는 법률이 생겼고, 전남 순천의 정원박람회가 성공적으로 치러지면서 국가정원으로 지정돼 명소가 되었다. 경기 안산시는 새로 생겨나는 빈 공간엔 나무를 심어 도시숲을 만들고 그 아래에 시민들과 함께 정원을 가꾸어 사람도 공간도 행복하게 하겠다는 도시의 비전을 선포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향후 10년간 정원산업이 적게는 5.6%에서 많게는 34.5% 성장할 것으로 내다본다. 그리고 지금의 정원이 디자인 중심인 데 반해 앞으로는 어떤 식물을 심어 어떤 꽃을 피우고 키워가는가가 중심인 식물 소재 부분이 24%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한다. 정원은 실외는 물론 실내공간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해 우리 곁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현재 정원에 심기는 대부분의 식물들은 외국에서 수입된 품종이다. 조달청에 등록된 식물을 기준으로 보면 우리 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종류는 4.5%에 불과하다. 상황이 이러하니 선진문화라고 하는 꽃을 통한 수출이나 문화 확산은커녕 우리 전통 고유의 공간에서조차 우리 꽃을 만나기 어려운 실정인 것이다. 한때 야생화 또는 자생식물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꽃 심는 일에 투자를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심어 놓으면 꽃을 피우는 기간이 너무 짧다거나, 야생에서 본 것과는 달리 꽃이 볼품없다거나, 그나마 심어 놓으면 몇 해를 가지 못하고 도태되어 버린다거나 하여 대부분은 그 결과가 성공적이지 못했다. 왜 그런 것일까!

야생에서 자라는 우리 꽃을 우리 곁에 두는 일은 야생을 떠나는 일이니 자연이 모든 것을 저절로 해주지는 않는다. 우선 들쑥날쑥 다양한 야생의 꽃들이 정원에 혹은 화분에 심길 때 적절한 크기와 모습으로 가능한 한 오래 피어날 수 있도록 선발되고 육종되어야 한다. 그리고 농가에서 우리가 필요로 할 때 언제든지 공급할 수 있기 위해선 빛이나 온도 등등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키워 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생산조건이 밝혀져야 한다. 꽃을 심고자 하는 소비자들은 어디서 구하여 어떤 땅에 심고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를 쉽게 알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일에는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물론 야생화 연구도 많이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조각조각 단편적이어서 가능성 있는 우리 꽃을 선발하고 번식하고 키우는 기술, 개화를 조절하는 등의 기술이 축적되고 재배하여 공급되는 시스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우리 주변을 차지한 외국의 꽃들은 이미 이러한 길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기에 우리가 가까이하기 쉬운 것이다.

수목원이나 식물원이 공원 혹은 휴양을 위한 공간들과 다른 점은 야생의 식물자원을 수집·보전하여 기록·관리하고 때론 이것을 자연에 복원하거나 인간에게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국립수목원도 그간 사라져가는 희귀 특산식물을 비롯하여 우리 식물들을 시급하게 조사·분류하고, 수집·보전하는 일에 가장 무게를 두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제는 우리 꽃을 우리 곁에 제대로 두는 일이 절박하게 다가오고 있다. 오래전 우리나라에서 유출된 다음 다른 나라 사람들의 손에 의해 연구·개발돼 세계적으로 인기 있게 팔렸던 ‘미스킴 라일락’이나, 크리스마스트리로 사랑을 받는 구상나무 소식에 마음 아파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올해부터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의 마음에 새겨지고, 나아가 세계의 사랑을 받는 우리 꽃 야생화를 만들어내는 지난한 일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한다. 걱정도 많지만 설렘이 앞선다. 이해와 격려가 꼭 필요하다.

이유미 | 국립수목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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