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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광장의 행진이 계속되고 있다. 맺힌 응어리와 분노로 화병(火病)에 걸릴 지경인 국민에게 광장은 치유의 장이기도 하다. 촛불을 흔들고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함께 부르다보면 아랫배에서 맺혀 온몸으로 퍼져가던 고통이 어느 정도 잦아드는 것 같다. 마음과 몸이 일체라는 해묵은 진리를 체험하는 순간이다.

광장은 깨달음의 장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직까지 마음의 식민지와 군사독재를 청산하지 못했다. 국가체제, 남북통일, 복지, 교육체계 등 우리 사회의 거대담론들에 대해 ‘그들 혹은 저들이 해결해야 할 일’이라는 예속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이어가려고 발버둥 치다보면 거대담론 앞에서는 그저 무력할 뿐이다. 그러나 광장은 우리의 이 시스템 전체를 ‘너와 내가’ 새로이 설계할 수 있고 또 설계해야만 한다는 깨달음의 장이 되고 있다. 이 깨달음이야말로 광장 이전과 이후를 역사적으로 구분하는 준거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 위대한 행진이 더 큰 성취를 이루기를 바라면서 광장의 진화를 꿈꾸어본다. 조직변화에 사용하는 방법 중에 ‘광장의 기법(open space technology)’이라는 것이 있다. ‘군중은 스스로를 조직화한다’는 자기조직화의 원리를 중심으로 하는 이 기법을 우리의 광장에 맞추어 변형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틀이 만들어진다.

한 주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자원봉사자들이 노점을 연다. 점포 앞에는 ‘약자를 위한 복지’ ‘양성평등’ ‘새로운 공화국의 시민 서약’ ‘아이들의 행복을 위한 교육제도’ 등 관심 주제를 간판으로 내건다. 점포에 갖추어야 할 것은 손님들의 제안을 기록하기 위한 커다란 종이와 보드마커정도이다. 무대는 준비하지 않는다. 모두가 대등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자원봉사자들은 점포를 방문한 손님들에게 주제에 관련된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고 손님들의 답을 받아 기록하고 정리한다. 손님이 많아서 감당하기 어려우면 먼저 개인별로 아이디어를 생각하게 하고 2인 혹은 4~5인 1조로 조별 토론을 거쳐 의견을 내게 한다. 500명이 모였다고 해도 5인 1조로 의견을 내게 하면 100명의 손님을 모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광화문광장의 경우 50~100개의 점포를 여는 것이 가능할 것이고 이 정도 숫자면 사람들이 품고 있는 다양한 생각들을 거의 다 담아낼 수 있다. 손님들이 오면 원으로 둥글게 모신다. 원은 완전한 평등, 대등한 참여, 모든 참가자의 면대면 상호작용을 상징한다.

손님들은 이 점포, 저 점포를 돌아다니면서 의견을 내놓는다. 이것을 ‘두 발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발이 두 개 있으므로 마음 가는 대로 돌아다니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사회적 자본’ 점포에서 자기 의견을 말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가도 심심해지면 ‘협치’ 점포로 이동한다. 자원봉사자들은 누구를 초대하려고 할 필요도 없고 손님이 오지 않는다고 초조해할 필요도 없다. ‘오는 사람이 맞는 사람’이고 언제든 ‘시작되는 시간이 최적의 시간’이며 ‘끝나면 끝난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조직화의 원리이다.

내 아이디어가 다소 불완전하고 어설퍼도 망설일 필요는 없다.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와 결합되어 아주 혁신적인 생각이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각 점포에서 의견들을 모은 다음에는 결과를 요약 정리하여 공유하는 시간을 갖는다. 최종결과는 수합하여 사회혁신과제로 공식화한다. 한 지인의 전언에 의하면 동학혁명 당시 삼례, 보은 집회에서도 이런 방식을 썼다고 한다. 확성기도 없던 시절에 평민과 노비에게도 익숙한 ‘장터’를 모델로 삼았다는 것이다.

새 대통령을 뽑고 정부체제를 일부 바꾼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광장은 우리 내면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식민지와 군사독재를 완전히 청산하고 삶의 방식, 사고체계, 사람들 간의 상호관계방식 자체를 혁신할 기회다. 모처럼 광장으로 되돌아온 ‘모든 권력’의 주인들이 역사적 대전환을 이루어낼 수 있도록 우리의 광장이 더 큰 깨달음과 혁신의 장으로 진화하기를 기대해본다.

신좌섭 | 서울대 의대 교수·의학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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