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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봄이 되면 자주 들려오는 노래가 있다.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 3인조 음악밴드 버스커버스커가 발표해 화제를 모았던 ‘벚꽃엔딩’이라는 노래다. 처음 들었을 때 영화의 한 장면을 악보에 그린 듯한 멜로디와 잘 어울리는 노랫말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벚꽃이 만개해 절정이 시작되는 순간과 나무의 몸에서 이탈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엔딩의 순간, 그 둘 사이의 간격은 찰나에 불과하다. 그래서 꽃이 피고 지는 것은 삶이 곧 죽음을 향해 가는 여정인 인생과 닮았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벚나무의 종류는 가까운 친척까지 세면 무려 200종이 넘는다. 가계도가 너무 복잡해 나무 박사들도 벚나무 얘기만 나오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고 한다. 서로 다른 종끼리 쉽게 교잡하는 까닭이다. 거리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잎을 틔우기 전에 꽃을 먼저 피우는 왕벚나무다. 나지막한 산비탈에서는 잔털벚나무와 개벚나무가 잘 자라고, 백두대간과 한라산 등 높은 산 숲속에서는 산벚나무가 서식한다. 산벚나무는 재질이 단단해 돌배나무 등과 함께 팔만대장경 경판으로 사용되었다는 귀하신 몸이다.

해방 이후 벚나무는 국적 논란을 피해갈 수 없었다. 1980년대 초에는 일제가 창경궁에 심었던 일본 벚나무 2000여그루를 창경궁 복원 과정에서 뽑아내기도 했다. 창경궁 옥천교 부근에 흐드러지게 피는 꽃들은 벚꽃처럼 보이지만 실은 매화와 앵두꽃이다. 1992년에는 국회의사당을 둘러싸고 있는 여의도 윤중로가 도마에 오른 적이 있다. 왜색이 짙은 벚나무를 무궁화로 바꾸자는 일각의 주장과 왕벚나무 원산지는 한라산이기 때문에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학자들의 견해가 팽팽하게 맞섰던 것으로 기억된다.

국적 시비야 어떻든 벚나무는 가로수의 왕이다. 전체 가로수의 약 22%를 차지한다. 최근 조사에서는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길거리 나무도 벚나무인 것으로 나타났다. 얼마 전까지 인기 1위였던 은행나무를 제치고 으뜸이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인기가 얼마나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구온난화로 개화 시기가 점점 빨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르면 50여년 후에는 벚꽃이 피는 시기가 지금보다 한 달 정도 당겨질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그게 맞다면 벚꽃이 봄꽃의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곳은 백두대간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봄꽃이 겨울꽃으로 바뀌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렇게 가다간 생태계가 뒤죽박죽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보통 개나리와 진달래, 벚꽃의 개화시기는 열흘 넘게 차이가 난다. 그런데 작년 봄에는 이 세 가지 꽃이 한꺼번에 폈다. 북상 속도도 이례적이다. 벚꽃은 따뜻한 제주도에서 처음 꽃을 피운 뒤 보름쯤 후에 서울까지 북상하는데, 작년에는 서귀포에서 꽃이 핀 뒤 단 사흘 만에 서울까지 올라왔다.

봄꽃이 일찍 피면 양봉 농가에도 비상이 걸린다. 여왕벌이 낳은 알이 부화해 꿀을 채취할 수 있는 일벌로 크려면 최소 한 달 이상이 필요하다. 그런데 벌들이 자라기도 전에 꽃들이 피었다 져버리면 벌들은 굶주릴 수밖에 없다. 남부와 중부의 개화시기 차이가 줄면 꿀 생산도 급감하게 된다. 양봉업자들은 꿀을 모으려고 지역에 따라 다른 개화시기에 맞춰 이동하는데, 서귀포와 서울의 개화시기 차이가 사흘 남짓에 불과하면 그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전국적으로 비가 내린 14일 오후 서울 여의도 윤중로의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 벚꽃잎이 떨어져 운치를 더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허기진 벌들이 꽃가루받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들도 생겨날 것이다. 불과 한 세대만 지나면 아이들은 곤충을 유혹하지 못하는 꽃, 열매가 사라진 나무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 아이들에게 꽃과 벌과 우리의 운명이 하나임을 가르치는 것은 지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이제 벚꽃엔딩은 지구온난화의 불길한 미래를 암시한다. 그러므로 열흘 전 창문 너머에서 사라진 벚꽃을 어찌 아쉽다고만 할 것인가.


안병옥 |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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