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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의 목적은 이상적 성과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런 협상은 본래 없다. 대신 최상의 타협안을 만드는 것이다. 지난 22일 가서명된 한·미원자력협정 역시 그랬다.

외교부는 그러면서 본문 21개 조항과 2개의 합의의사록으로 새롭게 구성된 협정문을 두고 ‘과거를 벗고 현재를 풀며 미래를 열다’라는 부제를 단 보도 자료를 사전에 배포했다.

2010년 10월부터 시작된 한·미원자력협정 개정협상 과정에서 한·미 양국은 그동안 11차례의 정례협상과 다수의 수석대표와 부대표급 회의를 가졌다. 그 결과 1974년 발효 후 42년 만에 사실상 대폭 개정했다. 이로써 한국은 냉전시대에 만들어진 협정의 커다란 먼지들을 털어냈다.

첫째, 40년이 넘은 과거 협정기한을 이번에는 원자력 분야의 기술 발전 등을 고려하여 20년으로 대폭 축소한 것과 둘째, 차관급 협의체를 신설하여 산하에 4개 실무그룹을 설치하여 사용후 핵연료 관리 등 한·미 간 원자력 협력 전반을 상시적으로 다루기로 합의했다. 마지막으로, 장래에 미국산 우라늄을 이용한 20% 미만의 저농축이 필요할 경우 협의를 통해 이를 추진할 경로도 마련했다. 이는 그러나 외교부를 비롯한 관계부처들이 그렇게 평가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 정부가 그렇게 본다는 이야기다. 미국 행정부와 의회가 이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렇다고 개정된 협정문이 정식으로 공개된 것도 아니다. 몇 가지 행정적인 절차가 남아있다. 특히 미국은 가서명된 협정을 관련 부처에다 핵비확산 평가 등을 거친 후 대통령의 승인을 받게 된다. 이후 양국 간 공식 서명식을 한 후 협정문 최종본이 의회로 이송되어 연속회기 90일 동안 반대가 없으면 협정은 발효된다.

우리 정부는 그러나 이번 협정문과 관련해서 국회의 동의가 필요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한·미원자력협정이 헌법 제60조 제1항에서 국회 동의를 받도록 규정한 조약에 해당하려면, 국가의 안전보장과 관련되거나 국가주권을 제약한다거나, 국민에게 중요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거나, 입법사항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국회 동의 여부는 개정내용 평가와 함께 유리컵 속의 절반의 물을 ‘절반이나 찬 것’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절반이 비어 있는 것’으로 보느냐라는 이른바 프레임 문제로 귀착될 수 있다.

그린피스 활동가가 23일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있는 서울 광화문 KT 건물 입구에 매달려 신고리 3호기 가동 승인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출처 : 경향DB)


심각한 논쟁은 따라서 이제부터다. 핵주권 문제부터 일본과의 등가성 비교까지 크고 작은 공방이 일어날 공산이 크다.

이는 누가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라 각각의 세계관(관점)만이 다를 뿐이다. 정부는 국익 관점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하겠지만 무엇이 국익인가에 대해서는 저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이미 블랙홀이 되어버린 ‘성완종 사건’에 모든 주요 이슈들이 빨려 들어가고 있는 작금의 현상이 누구에게는 득이 되고, 다른 누구에게는 실이 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렇다 할 주요 업적도 없이 3년 차에 들어서는 박근혜 정부가 이번 협정을 커다란 성과로 본다면 이를 어떻게 극대화할 것인가를 지켜보는 것도 주요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물론 반대로 ‘조용히’(low-key)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방식이든 협정문이 공개되지 않아 공정한 점수를 매기기란 쉽지 않다. 정부의 발표를 듣고, 보도 자료를 읽어본 소감으로만 점수를 매긴다면 ‘B플러스’는 되겠다 싶다. ‘A’를 줄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협정 내 모든 방안의 이행을 차관급 상설협의체에서 추진하고 점검해 나가도록 제도화했다는 ‘미래’에 방점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가시화되지 않은 일들에 미리 후한 점수를 주는 것에 내심 다소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병철 | 평화협력원 비확산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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