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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의 해가 저문다. 광장과 길거리를 터질 듯 가득 메운 촛불이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사회 변혁을 향한 힘찬 바람이 불고 있다. 그러나 변화의 물꼬가 막혀 있는 곳도 많다. 문재인 정부의 주요 공약인 ‘안전한 사회’와 ‘지속가능한 사회’가 그렇다. 지난 21일, 제천의 화재는 우리가 아직도 ‘대충’과 ‘설마’라는 안전 불감증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시설은 부실하고, 운영은 편의적이고, 점검은 형식적이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편하게’라는 암묵의 요구에 침묵의 동의를 하는 다수가 있는 한, 안전한 사회는 요원하다.

성장을 위해 더 많이 생산하고, 생산한 만큼 더 써야만 하는 경제체제에서 소비주의의 확산은 불가피하다. 소비주의는 이미 우리 사회의 거대한 흐름이 되었다. “나는 쇼핑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지적대로, 마트는 많은 사람들에게 순례 장소로 등극했고, 쇼핑은 예배가 되었다. 사람들은 얼마나 더 소유하고 소비해야 하는지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소비는 가히 경배의 수준에 올랐다. 이런 고도의 소비사회가 지속가능할 리 없지만, 변화를 택하는 사람은 소수다. “설마, 끝장이야 나겠나.” 사람들은 익숙해진 길을 좀처럼 포기하지 않는다.

많이 쓰고 쉽게 버리는 생활양식은 생태적 부담과 사회적 갈등의 주요 원인이다. 소비의 증가는 곧 쓰레기의 증가다. 쓰레기는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쌓이게 마련이라, 이제는 바다에도 거대한 쓰레기 더미들이 생겨났다. 글자 그대로 “우리의 집인 지구가 점점 더 엄청난 쓰레기 더미”로 변하고 있다(프란치스코 교종, <찬미받으소서>). 상시적 업무에 대한 비정규직의 확산은 우리 사회가 이제는 사람도 쓰다가 버리는 소모품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해준다. ‘버려진’ 노동자들은 아직도 살을 에는 추위에 거리를 헤매고 굴뚝에 올라가 내려오지 못한다. 사람들은 “강박적 소비주의”와 “집착적 소비주의”에 빠진 채 “소비의 자유를 누리는 한” 자유롭다고 착각한다(<찬미받으소서>). 소유와 소비의 능력이 성공으로 간주된다. 경쟁은 치열해지고, 불안과 위기의식이 고조된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더 몰아붙인다. 기약 없는 내일에 오늘을 담보로 잡힌 채, 스스로 노예가 된다. 소비주의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안전한 사회도 지속가능한 사회도 불가능하다. 부정하기 힘든, 암울한 전망이다.

누구나 행복하길 바란다. 소유와 소비에 매달리는 것도 그렇게 되면 행복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얻는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끝없이 ‘더’를 향해 질주하는 우리의 고단한 현실이 그 증거다. 사실 우리들은 일상의 소소한 체험을 통해 어떤 때 진정으로 행복해지는지 알고 있다. 앞만 보며 질주할 때가 아니라 옆을 보며 함께 갈 때, 뒤처진 사람들에게 서로 관대히 손을 내밀 때, 우리는 행복하다. 그 행복은 오래 지속된다. 인간 실존(ex-istence)은 자기 ‘밖에 서는(standing outside)’ 존재인 것이다. 자기를 비우고 거기에 타자를 채울수록 충만해지는 역설적 존재, 사람이다. 그러니 소비주의는 인간의 완성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길이다. 아무리 많이 소유하고 소비해도,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더’를 향한 끝없는 몸부림에 사로잡힌다.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는 정부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뜻하는 우리 각자의 적극적 응답이 필수다. 우리가 자신을 비움으로 충만해진다면, 소유나 소비가 아닌 내어줌과 검약을 우리의 기본 생활방식으로 삼지 못할 까닭이 어디 있는가.

송구영신의 때. ‘더 빨리, 더 많이, 더 편하게’는 이제 그만 우리 마음에서 지우자. ‘조금 천천히, 조금 적게, 조금 불편하게’를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기자. 그럴 때,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는 느리지만 분명한 우리의 현실이 될 것이다.

<조현철 신부·녹색연합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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