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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참
느리게 내린다
초고속의 시대에 눈은
빠르게 내려도
참 느리게 내린다
어느 하루
어느 성당에서 내려가던
나무들 사이
작은 길처럼
눈은 참
느리게도…
눈 보고
게으르다 하지 않으시니
부지런하다 하지 않으시니 눈은
참
그대로 내린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대로 내린다…
임선기(1968~)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눈송이가 하늘에서 내려온다. 성당 아래로 작은 길이 나목들 사이를 내려오듯이 고요하고 느리게. 참으로 느리게. 이 초고속의 시대에 아마도 제일 더딘 속도로. 그러나 제 속도로. 게으르거나 부지런하다고 말할 수 없는 제 본래의 속도로. 눈송이는 내리면서 춤을 보여주는 것 같다. 드문드문 말도 걸면서, 질서를 생각하지 않으면서, 무 밑동처럼 희고 시원한 생김새로, 차가운 절벽의 하늘을 참 느릿느릿하게, 제 속도로 내려온다. 이처럼 그대로, 타고 난 성품대로, 변함없이 그 모양이면 좋다. 그게 멋일 테다. 임선기 시인이 번역한 책 ‘눈’에서 프랑스 작가 막상스 페르민은 “눈은 한 편의 시이다. 구름에서 떨어져 내리는 가벼운 백색 송이로 이루어진 시. 하늘의 입에서, 하느님의 손에서 오는 시이다. 그 시는 이름이 있다. 눈부신 흰빛의 이름. 눈.”이라고 썼다.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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