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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끝에서

눈이 두 번 내린 후에

누군가 여행을 제안했을 때

겨울 들녘이 바람의 손을 잡는 걸 봤다


남포 들을 적시기 위한

김제 성덕의 방죽 물이

사람을 먹일 물고기를 기르고 있는 것까지

보고 나니

겨울 들판에서 여름 숲을 예비하는

그분의 사계를 만날 수 있었다


한 해를 여밀 기운을 비로소 얻어

여행자끼리 나누는 술잔에

지난 시간의 독기를 담가 씻고

새날에 새 잔을 건넬 수 있었다.


장재선(1966~)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한 해가 끝나가는 때에 시인은 김제로 겨울 여행을 가서 넓고 평평하게 펼쳐진 들판을 보고, 성덕 방죽의 길을 걷는다. 눈이 두 번이나 내린 겨울의 한복판이지만 새봄에 들녘을 적실 방죽의 물이 생명을 기르고 있는 것을 본다. 겨울이 봄과 여름의 계절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본다. 겨울과 봄이 마디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연달아 이어지고 또 서로 주고받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시인은 한 해의 끝은 매듭지어 끝마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한편에서 맞은편으로 물건을 건네듯이 지난 시간을 새날에게 옮길 일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 연말을 살고 있지만 이 연말의 때에 새로운 한 해는 이미 시작되고 있다. 마치 밤의 한가운데서 낮이 시작되는 것처럼. 한파의 땅 밑에 봄이 미리 마련되고 있는 것처럼.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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