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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경향시선

해 질 녘

opinionX 2019. 12. 30. 11:16

꽃 뒤에 숨어 보이지 않던 꽃이 보인다

길에 가려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인다.


나무와 산과 마을이 서서히 지워지면서

새로 드러나는 모양들.

눈이 부시다,

어두워 오는 해 질 녘.


노래가 들린다, 큰 노래에 묻혀 들리지 않던.

사람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사람이 보인다.


신경림(1935~)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때마다 끝맺음이 있다. 일몰도, 계절의 끝도, 한 해의 바뀜도 우리가 겪는 끝맺음의 때이다. 물론 일생의 해 질 녘도 있다. 연만하여 일생의 석양을 마주할 때가 있다. 시인은 이와 같이 해가 질 무렵이 되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이 잘 보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거대한 것이 오히려 지워지고 작고 소박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하잘것없어 보이던 것이 곧 꽃이요, 길이요, 노래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리라.

보잘것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지나온 한 해의 시간을 돌아보면 큰일들을 먼저 떠올리게 되지만 소소한 일들이 가져다주었던 기쁨도 결코 적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정이 넉넉하고, 감탄할 만큼 겸손하고, 숨김이 없이 참되게 살아가는 사람을 만난 일은 행복했다. 사람을 새롭게 얻은 일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시간이라는 물가의 모래들 속에 사금이 섞여 있듯이 돌아보면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많고, 또 그것들이 참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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