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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철 선생님께.
윤수입니다. 평소에 자주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엊그제 스승의날을 속절없이 보내는 바람에 마음이 무거웠고 또 곧 정년퇴임을 하신다고 하여 이렇게 귀한 지면을 빌려 인사드립니다.
세상사 바쁘다는 핑계로 5인 이상 모이는 자리에는 가급적 나가지 않는 것을 생활신조로 삼는 저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그래도 잊을 만하면 나가는 자리가 선생님을 뵙는 반창회입니다. 숱한 동창회나 모임을 꺼리되 유독 반창회만큼은 나가려 하고, 어쩌다 빠지기라도 하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저를 보고 식구들은 도대체 초등학교 5학년 반창회를 저토록 숭상하는 것이 신기하다고 합니다만, 저로서는, 그리고 1978년에 서울화계초등학교 5학년 5반을 다녔던 친구들이라면 제 마음의 그늘을 금세 알아채리라 생각합니다.
그해의 5학년 5반은 기나긴 학창 생활 중에서도 매일매일이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가득 찼던, 모두가 싱그럽게 열매 맺던 소중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 첫 추억이 생각납니다. 화계초등학교에서는 매주였던가 매달이었던가, 아무튼 토요일에 ‘하이킹’이라는 걸 가곤 했었습니다. 신학기 들어 첫 하이킹을 맞아 저희는 선생님을 따라 학교 뒷동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저희를 동산에 풀어놓고 마음껏 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친해지지도 않은 터라 저희는 눈치를 보며 시간을 보낼 따름이었습니다. 이윽고 선생님께서는 저희를 학교로 인솔해 내려가셨습니다. 교실로 들어가셔서, 선생님께서는 참으로 놀라운 이유로 손바닥을 한 대씩 때리셨습니다. 요즘이야 어떤 이유에서든 체벌해서는 안되지만 그때는 따끔하게 매를 대는 것이 어쩔 수 없는 교육과정의 하나로 받아들여지던 때였습니다. 아무튼 선생님께서는 저희들 손바닥을 한 대씩 따끔하게 때리셨는데, 그 이유란 놀랍게도 ‘잘 놀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용걸이는 기나긴 학창 생활을 돌이켜 봤을 때 ‘도대체 잘 놀지 못해서 맞아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라고 회상합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저희는 잘 놀았습니다. 실컷 놀았습니다. 쉬는 시간은 물론이고 수업 중에도 놀았고 점심 시간에도 놀았고 학교가 파한 후에도 운동장에 남아서 놀았습니다. 동네마다 몰려다니면서 놀았습니다. 아, 물론 맞지 않으려고 논 것은 아닙니다. 놀아도 괜찮다는, 잘 놀아야 한다는, 기를 쓰고 놀아야 한다는 선생님의 방목으로 저희는 해가 저물도록 놀았습니다. 국어 시간에도, 산수 시간에도 놀았습니다. 옆 반 선생님이 저희 교실 문을 벌컥 열고는 “아니, 이 선생. 애들 공부는 언제 가르칠 거요?” 했던 기억까지 납니다. 요즘의 학교 풍토에서는 상상도 못할 진짜 공부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무작정 놀게만 하지 않으시고, 자상하게 가르쳐주기도 하셨습니다. 물론 그게 피구에서 이기는 전략을 연마하거나 11월의 어느 날, 아침부터 첫눈이 내렸을 때, 수업하다 말고 뛰쳐나가서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점심 시간이 다 끝나가도록 눈싸움을 하거나 피리를 불거나 발야구를 하거나 또 하이킹을 가서 노래를 실컷 부르는 방법들이었지만 말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교과 공부가 최고라는 옆 반을 성적으로도 한번 이겨보자 해서 모처럼 선생님과 저희가 열심히 공부해서 최고 반을 따돌리고 평균 점수 1등을 한 일도 기억납니다.
선생님은, 어린 저희들이 보기에 만능 스포츠 선수였지요. 선생님의 스파이크는 매처럼 날카로웠고 야구를 하실 때는 그리 넓지도 않은 운동장에서 2루 도루까지 하셨지요. 상필이는 ‘아니 애들 앞에 두고 도루가 다 뭐냐?’고 추억을 되새깁니다. 6학년 선배들을 이기기 위해 수업 시간 내내 피구의 전략과 전술을 짜던 선생님의 열정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에서 성적이나 성별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를 앞세우거나 여학생이라고 열외를 시키는 일이 없으셨지요. 그래서 손미은이나 변기영 같은 친구들이 피구의 주전이었고 발야구의 투수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제 그런 추억들은 20세기의 유산으로 사라진 듯 보입니다. 파행에 파행을 거듭한 우리의 교육 현실은 이제 몸으로 부대끼고 웃고 떠들면서 성장하는 진짜 교육의 가치를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선생님 역시 저희들과 함께하던 시절보다는 그 이후로 아이들과 함께 스포츠를 즐기고 노래를 하고, 꽃 피면 꽃구경 가고 눈 내리면 눈싸움하던 방식을 어쩌면 포기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포츠 활동 또한 빈부의 격차에 따라 완전히 구별되어 예전 같으면 조금 형편이 어려웠던 저 같은 학생도 일단 교실에만 오면 온종일 뛰어놀 수 있었는데, 요즘에는 문화적 차별과 시선의 지배가 역력하여 어린 친구들이 완벽하게 통제되어 이미 학교에 들어서는 순간 주눅 들어 버리는 듯해 보입니다.
선생님. 이제 정년퇴임을 하신다 하니, 두 번 다시 그런 교실이 있을 수 없고 몸으로 서로 사랑하며 배우는 교실이 영영 사라지는 듯해 송구합니다. 선생님으로부터, 아이들은 기를 쓰고 해가 저물도록 놀아야 한다는 것을, 공을 차고 배트를 휘두르고 수영을 하면서 커야 한다는 것을 배웠지만 우리 세대에 이르러 이 귀한 스포츠 교육의 가치가 완전히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마음은 참담합니다만, 그래도 그 시절의 꼬마 아이가 선생님으로부터 몸의 교육을 배워 이렇게 가갸거겨를 겨우 떼고 먹고살 수 있게 됐으니, 이에 뒤늦은 ‘스승의날’ 인사를 올립니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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