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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닌 너와 관계라는 것을 맺으며 ‘우리’가 되면 느낄 수 있는 기쁨이 있다. 너를 통해 나를 알아가는 성찰의 기회, 차곡차곡 쌓이는 우리의 이야기들, 그리고 누군가에게 내가 소중하다는 느낌만큼이나 나도 누군가를 소중하게 다루는 것이 주는 즐거움은 우리를 생기발랄하고 살아있게 한다. 나와 너, 우리와 같은 말들은 어쩐지 따스하고 달콤하다.
그런데 자유로운 듯 하늘거리는 이 환희가 마냥 가벼운 것은 아니다. 모든 관계에는 커져가는 즐거움만큼이나 같이 자라는 책임이 있다. 관계 속에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너의 행복에 대한 나의 책임도 어느새 배어 있다.
기쁨이 하늘 위로 마냥 두둥실 날아가지 않도록, 책임은 우리에게 의무를 지우고 때론 희생을 요구하기도 한다. 책임은 힘들고 싫은 것, 무거운 것이다.
그래도 인간이 나를 홀로 두기보다는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며 더불어 살고자 하는 것은 손익계산상 그래도 관계가 주는 즐거움이 더 크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나와 너, 우리, 가족, 동료, 이웃과 같이 수많은 관계들이 촘촘한 픽셀로 모여 만들어진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면, 이제는 즐거움과 책임이 빛과 어둠처럼 양분되어 공존하는 것 같지 않다. 오직 책임만이 더없이 가벼워졌고 또 계속해서 한없이 가벼워지고 있다.
우리나라 노동시장에서 점점 만연하고 있는 하청, 파견, 그리고 아웃소싱 방식의 계약관계망에서 업체, 고용주, 그리고 다양한 형태로 일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 간의 관계를 살펴보면 책임의 비대칭성은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하청과 외주화는 현재 한국에서 주요 제조업뿐만 아니라 건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경험하는 가전 수리, 통신, 보안, 청소 등의 서비스업 그리고 공공부문에까지 놀랄 만큼 확대되어 있다. 이러한 다단계방식의 하청구조가 실제로 원청업체에 얼마나 양적으로 질적으로 이득이 되는 것인지는 잘 따져봐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원청업체가 노동자들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곧바로 계산되는 원청업체의 이득분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노동자의 임금이나 퇴직금이 체불되어도, 심지어 일하다 사고로 사망해도 그건 하청업체 고용주와 노동자들끼리 알아서 어떻게 해결할 일이다. 근로환경 개선, 임금 인상과 관련된 일 등 골치 아플 수 있는 갈등도 고용주가 노동자를 직접고용하지 않으면 신경을 끌 수 있다. 원청업체는 다만 낮은 단가로 같은 일을 해내줄 업체와 계약만 맺으면 그만이다.
파견직도 마찬가지다. 파리바게뜨 가맹점에 파견나온 제빵사가 빵을 굽다가 화상을 입어도 가맹점주는 산재의 책임에서 자유롭다. 공공부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책임도 가벼워지고 있다. 공공부문에서 이루어지는 상시적인 업무조차 상당 부분 민간 위탁으로 외주화되어 운영되고 있다. 제한된 시간에 하청업체가 지시한 일을 끝내려다 사망한 김모군도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사고를 당했지만 서울메트로의 법적 책임은 가벼웠다.
꼭 복잡한 다단계 방식의 하도급과 아웃소싱의 구조 속에서 관계가 갖는 모호성 때문에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지만의 문제는 아니다. 단기계약으로 관계를 맺으면 고용주는 노동자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더 쉽다. 계약이 만료되거나 해고시켜 버리면 더 이상 책임질 일도 없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청년들이 성폭력과 폭언, 협박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들은 이제 한국 사회에서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책임을 묻는 것조차 두려워 개인에게 책임을 지워버린다.
한쪽에서 너무나도 가벼워진 책임들은 결국 약한 개개인들에게만 비대칭적으로 기울어져 있다. 남은 것은 오로지, 모두 필사적으로 피하려고만 하는 법적 책임일 뿐이다. 우리도 일상에서 매일 마주치는 노동자들이 열악한 근로환경과 불안정한 삶에 내가 직접 고용한 것도 아니라면, 그리고 법적 책임이 없다면 역시 윤리적 책임에서 자유로워도 되는 것일까.
결국 우리는 수없이 많은 다양한 관계들 속에서야 나는 누구이고, 왜 살고 있고, 또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답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보다 대칭적인 관계들로 촘촘하게 이루어진 사회는 궁극적으로 사회적 연대감이 강하게 흐르는 사회다.
나와 관계 맺은 이를 소중하게 여기며 책임을 다할 때는 그도 나를 소중하게 여겨줄 것이라는 믿음이 주는 안도감이 있다. 이런 막연한 믿음이 주는 안정과 평온함이 있는 사회는 발밑의 따뜻한 땅과도 같이 또 다른 차원의 행복과 즐거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이승윤 이화여대 교수 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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